고구려 역대 왕계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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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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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7년경부터 668년까지 동방을 대표하던 고대국가. 사서에는 "구려", "고려"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목차
역사
건국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동명성왕이 졸본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로 한 것이 기원이다. 그러나 동명왕편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 및 부여 출신의 유이민(본 역사사전에서는 이를 「고구려족」이라 지칭한다.)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세력에 의해 더 일찍 건국되었을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한다. 서기 3년에는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초기의 고구려는 부여 및 한나라의 군현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비옥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벌였다. 또한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고구려는 왕족인 계루부를 포함한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성장
53년에 즉위한 태조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다.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복속시키고 한 군현에 대한 공격으로 경제적인 기반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4년 위나라의 관구검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 때의 국상(재상의 지위) 을파소는 194년에 진대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4세기에 이르러 중국 대륙이 5호 16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고구려의 정복 활동이 활발하게 재개되었는데, 미천왕은 313년 낙랑군을 점령함으로써 동방에서 중국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그러나 아직 부족별로 흩어져있는 힘을 조직적으로 통합하지 못하여 그 다음 왕인 고국원왕 때에는 342년 연나라의 대대적인 침공과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의 침공으로 인해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융성
소수림왕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한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372년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여 국교로 삼았으며, 태학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이를 통해 중앙집권화가 더욱 진전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대에 이르러서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 대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서쪽으로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을 모두 차지하고 요서의 일부 또한 확보하였으며, 이어서 등장한 북연과도 친선관계를 수립하였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 비려를 복속시켰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위축시키고 왜와 가야의 침공을 계기로 신라를 보호국화 했다. 또한 가야를 공격하여 전기 가야 연맹을 해체시키기에 이르렀다. 그 후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중국 대륙의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 대륙을 견제하였다. 또 427년에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현재의 서울 인근)을 함락하면서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히는 적극적인 남하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제국들과 거의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쇠퇴와 멸망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헸다. 안원왕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고구려 침공을 감행,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이 발흥하였다.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는 신라와 밀약을 맺고 신라와 백제 간 동맹을 깨트리는 한편, 돌궐의 침공에 대항하였다. 돌궐과의 전쟁이 교착 상태에 이르자 고구려는 다시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 때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재통일하고 고구려에게 복속을 강요했는데 고구려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자, 수나라는 598년, 612년, 613년, 614년에 각각 침공하기에 이른다. 특히 수나라의 두 번째 침공 당시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에서 활약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살수대첩) 결국 수나라는 이 전쟁의 충격으로 멸망하였으며, 고구려도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당나라와도 대치하였다.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하는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들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비롯한 귀족들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쥐었다.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자, 고구려는 백제와 연합하여 나당동맹에 맞서는 남북동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신라의 당성(당항성)을 공격하는 등의 작전도 펼쳤지만, 근본적으로 긴밀한 동맹관계는 아니었다. 645년 당 태종 이세민이 침공했으나,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의 활약으로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에도 당나라는 끊임없이 고구려를 침공해 왔으나 그 때마다 간신히 격퇴시켰다. 그러나 수나라와 당나라의 전쟁으로 고구려의 경제력을 바닥이 났고, 신라의 발목을 잡아 고구려의 남쪽을 유지해 주던 백제마저도 멸망당했다. 결국 백제를 멸망시키고 여세를 몰아 남북에서 쳐들어오는 나당 연합군에 노출되었다. 661년,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를 남북에서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가 간신히 막아내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 자식들의 권력 투쟁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연개소문의 맏아들인 '연남생'이 당나라로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666년) 668년 고구려는 남북에서 밀려들어오는 나당 연합군을 막지 못하고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써 705년에 걸친 장대한 역사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검모잠, 안승 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다. 또한 671년까지, 안시성은 (보장왕이 항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함락당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결국 698년 고구려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게 계승되었다.
고구려의 정치
고구려의 정치적 기반으로는 소노부(消奴部)·계루부(桂婁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의 5부족 연맹의 조직을 들 수 있다. 처음에는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의 고씨(高氏)가 왕위를 대신하였다. 절노부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왕비족으로 등장하였고, 전 왕족인 소노부, 왕족인 계루부·절노부의 대가(大加:嫡統大人)에게는 고추가(古雛加)라는 특별 칭호를 주었다. 이는 신라의 갈문왕(葛文王), 백제의 길사(吉師)와 같이 귀인(貴人)이라는 뜻이다.
고구려 초기의 관제는 왕 아래에 상가(相加)·대로(對盧)·패자(沛者), 이하 주부(主簿)·우태(優台)·승(丞) 등의 관리가 있었고, 왕과 제가(諸加)는 사자(使者)·조의(皁衣)·선인(先人) 등의 가신(家臣)을 거느렸다. 평양 천도 이후 행정조직과 관등(官等)조직이 정비되어 수상인 대대로(大對盧)·태대형(太大兄) 등 10여 관등이 정비되었고, 대대로는 원칙적으로 3년마다 선거로 뽑았다. 관등명을 보면 형(兄) ·사자(使者)가 붙은 것이 많았는데, 형은 연장자라는 뜻으로 족장의 자리를 계승한다는 의미이며, 사자는 지방의 조세징수자의 뜻을 의미하는 것이다.
행정구역은 중앙을 동 ·서 ·남 ·북 ·중(내)의 5부로 나누어 대가가 통치하였다. 지방행정구역은 5부의 연맹체가 5부의 행정구역으로 전환되었다. 각 부 밑에는 여러 성(城)이 딸려 있었다. 각 부의 장을 욕살(褥薩), 성(城)의 장을 처려근지(處閭近支) 또는 도사(道使)라고 불렀다. 이 지방장관은 관리와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겸직하였다. 특수행정구역으로 평양성·국내성(國內城:通溝) ·한성(漢城:載寧)을 삼경(三京)이라고 하였다.
군사제도는 군사조직을 행정조직과 일치시켜 욕살·도사 들은 자기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국가에서 동원할 때는 대모달(大模達)·말객(末客) 등의 군관으로 임명되어 총사령관의 지휘아래에 놓인다.
고구려의 사회, 경제
3세기경 고구려의 총 호수는 3만 호, 지배계급 수가 1만여 명, 멸망 전의 총 호수는 69만 7,000이고, 성곽 수는 176성에 달하였다. 지배층인 왕족과 관료는 정치 ·군사 ·교육 등을 담당하고 생산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농민 ·노비 등은 하호(下戶)라고 하여 생산에 종사하는 피지배층이었다.
삼국시대에는 고리대금업도 성행하여 평민을 노비로 몰락시키는 폐단이 생기자, 194년 고국천왕은 이를 막고자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하고 진대법(賑貸法)을 마련하여 빈민구제에 힘썼다. 부족국가시대의 제가 회의(諸加會議)는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고구려 사회는 법률이 엄하여 반역자는 불로 태우고 목을 잘랐으며, 살인자와 전쟁에 패한 자는 목을 잘랐고, 도둑질을 한 자는 12배의 배상을 물렸으며, 우마(牛馬)를 죽인 자는 노비로 삼았다.
조세제도는 곡식으로 각 집마다 받는 조(租)와, 베(布)나 곡식으로 개인에게서 받는 인두세가 있었다. 산업은 직조기술이 발달하였고, 일본에 전파된 물품과 기술을 보면 철공 ·종이 ·묵필 ·맷돌이며 모피류가 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역은 주로 중국 및 유목민족인 북방족들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