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조선 역대 왕계표 |
---|
|
한국의 역사 |
---|
목차
역사
건국과 초기의 혼란
14세기 말 당시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나라 고려는, 안으로는 기존의 귀족 세력과 그에 반발하는 신진 사대부들이 대립하여 정치가 혼란하였고, 밖으로는 계속되는 야민족의 침입과 명나라 성립 시기의 혼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무렵 고려의 북방 호족 출신인 무신 이성계(조선 태조)는 야만족의 침입을 여러 차례 물리치고 명성을 얻어 중앙 정계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무렵 고려 조정은 명나라의 대(對)고려 전진기지인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는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평양에 있던 최영에게 회군을 청했다. 그러나 회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1388년 5월 20일 군사를 수도로 돌려 쿠데타를 일으켰다(위화도 회군). 이성계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최영 세력을 숙청하고 우왕을 폐위한 뒤 창왕을 왕위에 올렸다. 동시에 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들과 손잡고 전제 개혁 등 여러가지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듬해에는 창왕을 다시 폐하고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 1392년에는 정몽주를 제거하고 그 해 7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건국하였다.
1393년 2월 15일에는 나라의 이름을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고치고 1394년 1월에는 당시 남경이라 불리던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하였다. 또한 고려의 법제를 개혁하여 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태조는 8번째 왕자인 의안대군을 왕세자로 삼았으나 개국 당시 공이 컸던 5번째 왕자 정안대군(방원)은 이에 불만을 품고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1398년 정안대군은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켜 왕세자 의안대군과 7번째 왕자 무안대군, 그리고 왕세자를 지지했던 정도전과 그의 일파를 살해했다. 그리고 2번째 왕자인 영안대군(방과)에게 왕세자 자리를 양보하여 그해 9월 태조는 왕위를 영안대군에게 물려주었고, 영안대군은 조선 정종이 되었다.
그러나 왕위에 야심을 품고 있던 또다른 왕자 회안대군은 제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웠으나 큰 보상을 받지 못해 불만을 품은 박포와 공모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안대군의 군사와 개경에서 맞붙어 패했으므로 회안대군은 유배되고 박포는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 정종은 정안대군을 왕세제로 삼고 11월에 정안대군이 등극하여 태종이 되었다.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하고 사병을 폐지했으며 조세 제도와 호적 제도를 개혁하였다. 또한 왕실 외척과 공신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여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켜 정치를 안정시켰다. 또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신하들을 견제하게 하였다. 이렇게 다져진 안정을 기반으로 등극한 세종대왕은 학문·군사·과학·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했다. 이 시기에는 성리학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정착하였으며, 의생활을 풍부하게 할 면화가 보급되었다. 또 군사력 강화를 목적으로 북방 지역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했고 화포 제작 및 조선 기술 발전 등을 통해 왜구의 약탈을 방지하였다.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진흥했다. 또한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금속활자를 개량하였으며 아악을 정리하였다. 개량된 금속활자로 여러 가지 책을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의서 편찬《향약집성방》을 통해서 의료 관계 개선이 집약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의 발전과 안정
태종, 세종 시기 안정된 국력을 닦은 조선은 단종 애사 등 몇몇 정치적 혼란이 있었으나 세조가 이를 극복하고 조선을 더욱 안정시켰다. 이때 조선의 왕권은 가장 강력했으며, 제도는 빠르게 정비되고 있어다.
성종은 건국 이후의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다. 유학을 장려하여 홍문관을 설치하고, 수많은 역사책을 편찬했으며, 세종 때부터 이어온 법전 편찬 사업인 《경국대전》 편찬을 완성하였다. 성종은 《경국대전》의 편찬을 반포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하였다. 또한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연산군의 절대왕권에 대한 집착은 사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 반정으로 실패하고, 이때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파는 4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큰 타격을 받았지만 꾸준히 힘을 키워, 결국 명종 때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 때부터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왜란과 호란의 극복
1592년, 일본열도를 통일하고 내부 갈등을 통합해야 할 필요를 느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왔다.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미처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조선군은 대규모 조총 부대를 앞세운 일본군에 크게 고전하여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러나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일본 수군을 대파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에 의해 일본 육군은 보급이 끊기다시피 하여 곤란을 겪었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의 지원으로 조선군은 7년만에 일본군을 몰아냈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일본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룬 후 피폐해진 국토를 정비하기 위해 사림 정치를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들을 매일 훈련시켜 국방을 강화하였고, 호적을 다시 정비했으며, 전쟁 기간에 불에 탄 사고를 재정비했다. 또한 실리를 중시한 외교를 펼쳐,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와 망해가는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인에 의해 정계에서 배제된 서인과 남인은 권력을 획책하기 위해 연합하여 광해군을 몰아내어 인조를 옹립하였다(인조반정). 보수적인 서인과 남인의 지지를 받고 즉위한 인조는 다시 명나라와의 친선 정책을 펼쳤고,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는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청나라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청나라를 대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전란이 계속되고, 붕당이 심해지는 이 시대에도 의학자 허준은 《동의보감》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1597년과 1608년에 발간했다. 이 책은 우리 나라의 동의학을 기준으로 하여, 대부분 의학서를 참고하고 만들었다. 다양한 약재와 치료법을 소개하고있다.
병자호란이 종식되어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게 된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사대하였으나, 실제로는 은밀하게 국방 강화에 힘을 기울이면서 청나라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효종은 “청나라를 정벌하여 문화대국인 조선이 문화가 낮은 오랑캐인 청나라에게 당한 수치를 씻자” 며 청나라를 혐오하여 강력히 배척한 송시열, 이완 등 강경파를 중용하여 군대를 대량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했다. 이러한 북벌론(北伐論)은 1659년 출병 직전 효종이 서거하자 사실상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 북벌론은 실제 청나라를 정벌하려는 의도보다는 이를 명분으로 왕권을 확보하고, 친위세력을 키우려는 측면이 강하다. 효종 이후에도 남인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정세 변화를 살펴봐서 북벌 움직임이 다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효종 때와는 달리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북벌은 어렵다는 판단하에 계속 보류되어 결국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이후 북벌론은 병자호란 때에 자신들이 자초한 패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던 서인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남인들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들의 집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지만, 전란 후의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외부 세계와의 고립을 초래하여 고립화의 길을 걸어 조선 사회의 낙후를 가속화하였다.
조선 후기 역사의 전개
그에 반면, 당시 청나라는 중국 대륙을 장악한 뒤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으며, 화포·자명종·만국지도 등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북학론(北學論)이 대두되었다.
북학론 이외에도 다양한 사상들이 싹텄는데, 이들 사상은 성리학의 관념적인 측면에서 벗어나 실질적으로 세상을 개혁하려는 시도였다. 이를 실학이라고 한다. 실학사상은 당시로서는 진일보 한 것이 많았다. 특히 정약용의 《여전론》이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근대뿐만이 아니라 현대의 학계에서도 매우 진일보하게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연구는 어떻게 하면 봉건 통치세력들의 틈바구니에서 정치를 잘할수 있는가, 그리고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수월하게 관리하여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을까 하는 봉건제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실학사상의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김정호, 김홍도, 유득공, 이긍익, 이수광, 이익, 박제가, 박지원, 정약용, 최한기가 있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의 정치력은 근본적으로 지주제에 토대하였기에, 그들의 개혁안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인 정권은 기층 사회의 움직임에 미봉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서인 정권의 위기는 겉으로는 남인측의 도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서인이 주도하는 정국에서도 남인은 꾸준히 진출하였다. 특히 현종의 스승이었던 윤선도가 남인 계열로서, 오랫동안 야당적 입장에 머물러온 남인의 지위를 부상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남인들은 서인 정권이 추구한 개혁의 부당성과 북벌론의 무모함을 지적하면서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일으켜 서인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더구나 예송논쟁이 정체(政體)문제와 관련을 가지면서 두 정파 간에 심각한 갈등을 자아냈다. 예론을 중심으로 한 붕당 사이의 대립은 예(禮)의 문제가 당시에는 사회질서의 기본적인 규범이었으므로 붕당정치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예송논쟁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국상(國喪)에서 자의왕대비의 복제(服制)문제를 계기로 일어났는데, 차자로서 왕통을 이은 효종을 적통으로 보느냐 안 보느냐의 시비였다. 1659년(현종 원년)의 1차 논쟁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1674년(숙종 원년)의 2차 논쟁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남인의 정치적 지위가 신장되었다.
그러나 경신환국에 의하여 1680년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 정권이 다시 수립되면서 붕당 사이의 대립양상은 크게 달라져갔다. 즉 다시 집권한 서인은 철저한 탄압으로 남인의 재기를 막았다. 이때, 서인은 아예 남인을 완전히 축출하자는 노론]과, 남인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소론으로 분열되었으며, 두 세력 사이의 대립으로 정국의 반전이 거듭되었다. 이로부터 견제와 균형, 공론에 토대한 붕당정치의 기본 원리는 무너지고, 상대 세력의 존재 자체를 아예 인정하려 들지않는 일당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상대당에 대한 보복으로 사사(賜死)가 빈번하였고, 정쟁의 초점이 왕위 계승 문제로 비화되는 등 붕당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이 때 숙종은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를 하는 환국을 일으켜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을 자주 교체하였다. 숙종의 잦은 환국은 경종 때에 이르는 동안에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지경까지 발전하였고, 경종 때에는 왕세제가 된 연잉군의 대리청정 문제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동향은 사회 경제적 변화를 바탕으로 일어났다.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정치 집단 사이에서 상업적 이익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이를 독점하려는 경향이 커졌다. 정치적 쟁점도 예론과 같은 사상적인 문제여서 군사력과 경제력 확보에 필수적인 군영을 장악하는 것으로 옮겨갔다.
한편, 향촌 사회에서는 지주제와 신분제의 동요에 따라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가 어렵게 되어 붕당 정치의 기반도 무너지게 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당시, 조정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과 그들을 몰아내고 다시 집권하려는 소론으로 나뉘어져서,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러한 당파 싸움에 영조는 넌더리를 낸 나머지 조정을 어지럽히는 당쟁을 타파하기 위해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기용하는 한편, 통치 이념으로 탕평론을 채택하였다. 탕평이란 정치를 할 때 편과 당을 좇지 않고 지극히 중립적이고 신념에 따라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후 탕평책은 영조 때 정국 운영의 가장 큰 원칙이 되었다. 영조는 노론을 한 사람 기용하면 상대 자리에는 소론을 기용하는 쌍거호대(雙擧互對)를 실시하는 것으로 탕평책을 실천했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탕평정치는 그의 손자인 정조에게로 이어진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시파와 벽파 간의 갈등을 경험한 정조는 할아버지인 영조의 탕평정치 의지를 받들어 더욱 발전시켜 나갔는데, 그 주요 조치를 살펴보면 대신 한 사람이 정승을 고발하거나 풍문에 의거하여 탄핵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는 당시 대간을 이용하여 상대당의 수뇌를 공격하는 파당의 전통적인 관행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당시 붕당 조성의 주요 통로였던 인사권이 임금이 직접 개입함으로써 조정에서 당파의 영향력을 줄이고 임금과 정승들이 조정의 주도권을 확보해나갔다. 그리고 연좌법과 대역죄 적용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대역죄를 빙자하여 다수의 상대당 인물을 일시에 탄핵하는 관행을 철폐시켰다. 뿐만 아니라 아예 조정에서 대신들이 당파를 지목하거나 당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를 금지함으로써 파당의식 자체를 없애고자 하였다.
또한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임금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특히,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시행하였다.
조선 말기의 혼란
정조가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그의 어린 아들 순조가 즉위하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으로 일시적으로 암흑기를 가졌던 당쟁과 일당독재체제는 정조의 뒤를 이어 어린 임금들이 연달아 등극함에 따라 강력한 왕권이 사라지면서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의 형태로 변질되었다. 이는 선조 이후 오랫동안 조선의 정치권력의 기본 구조였던 붕당정치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순조 때에 정권을 잡았던 안동 김씨 세력은 헌종이 즉위하면서 풍양 조씨에게 잠시 권력을 내주었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정권을 잡아 세도를 떨쳤다. 60년간 이어진 세도정치의 영향으로 왕권은 한없이 나약해져갔고 백성들은 물론 왕족들마저도 안동 김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형적인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는 온갖 부정부패를 야기했는데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 등 이른바 삼정의 문란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자 이에 대항하는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순조 때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다.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도하에 수많은 몰락한 농민들과 영세농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한때 청천강에서 의주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장악했으나 4개월 만에 관군에 의해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민란은 계속 이어져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도 정권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갔다. 1820년의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의 만연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피해는 그 뒤 수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굶주려 떠도는 백성이 거리를 메울 정도였다.
이후, 세도정치는 부패한 정치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군 이하응의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이하응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래서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세도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였다. 가장 말썽이 많던 환곡 제도를 폐지하였고, 군역 제도를 고쳐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물려 민심은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또한 붕당의 온상으로 인식되어 온 서원을 대부분 철폐하여 유생들의 불만을 샀다. 나아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법전을 정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바로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된 경복궁을 다시 짓는 데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경복궁의 중건 외에도 의정부, 종묘, 종친부, 육조 이하 각 관서 및 도성, 그리고 북한산성의 수축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로써 황폐해졌던 한성이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이는 재정의 열악을 가져왔다.
흥선대원군이 로마 가톨릭을 탄압하면서 프랑스인 신부들을 처형한 것을 구실 삼아 1866년,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해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조선에 대해 사과와 손해 배상, 그리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은 여러 곳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고, 결국 프랑스군은 수많은 재물을 약탈한 뒤 철수하였다(병인양요). 이로부터 5년 뒤, 이번에는 미국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미국인들은 1866년 미국 상인이 대동강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배가 불에 탄 사건(제너럴 셔먼 호 사건)을 추궁하였다. 그리고 사과와 통상 교섭을 요구하여 왔다. 흥선대원군은 이들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미군은 강화도를 공격하였고, 그들은 조선군의 끈질긴 저항에 못 이겨 결국 물러가고 말았다(신미양요). 미국과의 전쟁을 끝낸 후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왔는데, 싸우지 않으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친해야 하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이라 적혀 있는 척화비(斥和碑)가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 이후 강력한 쇄국 정책으로 서양과의 수교를 단호히 거부하여 흥선대원군의 집권 시절에는 외세가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이러한 정책은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개항과 근대화 사이에서
1873년 11월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면서 10년간 정권을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민씨척족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통상 개화론자들이 대두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1875년 9월 20일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에게 문호를 개방하라며 압박했다.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찬반 양론이 엇갈렸으나 결국 개항찬성론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어 1876년 2월 3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어서 고종은 일본에 파견한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할 때 가져온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라는 책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에 따라 1880년 10월 11일 미국과 국교를 열었으며, 뒤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들과 맺은 조약들은 모두 치외 법권을 규정하고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처를 거의 취할 수 없게 규정된 불평등 조약들이었다.
조정의 개화 정책 추진과 유생층의 위정 척사 운동은 점점 격화되는 열강의 침략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불 등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혁의 욕구가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 운동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세우고 전라도 일대를 공략한 다음 전주를 점령하였다(1894년). 농민군은 조정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산발적으로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며 개혁을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조정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먼저 공주를 점령하려 한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좌절되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지배권을 빼앗고, 요동반도를 할양받아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였다. 고종은 이에 미국, 러시아 등과 가까운 김윤식, 이범진 등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반일정책을 구체화하였다.
삼국간섭 후, 일본은 요동반도를 잃었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고자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난입시킨 후 친러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을미사변). 이에 앞서 고종은 1894년 8월에 일본의 강요에 의해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새로운 조정 내각을 구성하였다. 새 정부는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토대로 조선의 근대화 정책을 수행하려하였으나 외세의 간섭과 유생 및 농민세력의 반발로 수월하게 개혁이 이뤄지지 않았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고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암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무죄가 선고하여 석방시켰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의 상인 및 어인 등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였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이 주도하였다. 일본군이 의병 토벌로 서울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이후 고종 임금은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 제국을 선포하며 새로운 체제를 꿈꾸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