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유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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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대 왕계표
  1. 동명성왕(기원전 37년~기원전 19년)
  2. 유리왕(기원전 19년~서기 18년)
  3. 대무신왕(18년~44년)
  4. 민중왕(44년~48년)
  5. 모본왕(48년~53년)
  6. 태조왕(53년~146년)
  7. 차대왕(146년~165년)
  8. 신대왕(165년~179년)
  9. 고국천왕(179년~197년)
  10. 산상왕(197년~227년)
  11. 동천왕(227년~248년)
  12. 중천왕(248년~270년)
  13. 서천왕(270년~292년)
  14. 봉상왕(292년~300년)
  15. 미천왕(300년~331년)
  16. 고국원왕(331년~371년)
  17. 소수림왕(371년~384년)
  18. 고국양왕(384년~391년)
  19. 광개토 대왕(391년~412년)
  20. 장수왕(412년~491년)
  21. 문자왕(491년~519년)
  22. 안장왕(519년~531년)
  23. 안원왕(531년~545년)
  24. 양원왕(545년~559년)
  25. 평원왕(551년~590년)
  26. 영양왕(590년~618년)
  27. 영류왕(618년~642년)
  28. 보장왕(642년~668년)

고구려의 2대 임금. 생몰연대(기원전 38년~서기 18년). 재위(기원전 19년~서기 18년)

동명성왕의 제1왕후인 예씨부인의 아들이다. 부여에서 태어났으며, 19살에 동명성왕을 찾아 부여에서 내려와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되었다. 태자로 책봉된 직후 동명성왕이 죽는 바람에 정치적 기반이 미약한 상태에서 왕위에 오른다.

유리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개국공신들·송양(송양왕)의 딸들과 결혼하여 왕권을 안정시킨다. 기원전 9년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선비족을 토벌하였다. 이는 군권을 장악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여진다. 이후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겨 적대관계에 있던 부여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고, 이 과정에서 왕권도 강화되었다. 이후 한나라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서기 14년에는 2만의 군대로 한나라의 동방전초기지인 현도군 고구려현을 점령하는 성과를 거뒀다.

유리왕은 여러 사람을 죽이는데, 이 가운데는 해명태자도 포함되어 있다. 해명태자에 앞서 큰 아들 `도절`이 있었는데, 이 또한 서기 1년에 죽는다. 더군다나 탁리, 사비를 죽이고 개국공신인 협보의 관직을 배앗는 등 연이은 숙청이 이어진다. 이는 유리왕이 왕권강화에 매우 집착하는 인물이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왕권 안정화를 위해 여러 왕후를 두었는데, 이를 조율하지 못해 답답한 마음을 담은 '황조가'라는 노래가 전해진다.

유리왕의 아들과 왕후들

  • 왕후 송씨(松氏) : 다물후(多勿侯) 송양왕(松讓王)의 딸이다.
  • 왕후 송씨가 기원전 17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아래의 아들들은 또다른 송씨부인으로부터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 해명(解明. 기원전 12년 ~ 서기 9년) : 두 번째 태자. 정치적으로 제거됨.
    • 무휼(武恤. 서기 4년 ~ 서기 44년) : 서기 18년 음력 10월, 대무신왕(大武神王)으로 즉위하였다.
    • 여진(如津. ? ~ 서기 18년) : 서기 18년 여름 음력 4월, 물에 빠져 죽었다. 여진의 죽음에 유리명왕은 크게 슬퍼하여 시체를 찾았으며, 시체를 찾은 사람에게 금 10근과 밭 10경을 상으로 내렸다.
    • 해색주(解色朱 또는 解邑朱. ? ~ 서기 48년) : 훗날 민중왕으로 즉위하였다.
  •  ? (재사의 어머니는 밝혀져 있지 않다.)
    • 재사(再思. ? ~ ?) : 6대 태조왕의 아버지이다.
  • 화희(禾姬), 치희(雉姬) : 기원전 17년에 맞아들인 후궁들로, 화희는 골천(鶻川)사람의 딸, 치희는 한나라 출신이다. 화희가 치희를 천하게 여겨 자주 다투자, 치희는 수치심을 느껴 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치희를 되찾기 위해 유리왕이 따라갔으나,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에 유리명왕이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가 노니는 모습을 보며 지었다는 노래가 바로 '황조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