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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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역대 왕계표

박씨

1대 박혁거세 (기원전 57년~서기 4년)

2대 남해 차차웅 (4년~24년)

3대 유리 이사금 (24년~57년)

석씨

4대 탈해 이사금 (57년~80년)

박씨

5대 파사 이사금 (80년~112년)

6대 지마 이사금 (112년~134년)

7대 일성 이사금 (134년~154년)

8대 아달라 이사금 (154년~184년)

석씨

9대 벌휴 이사금 (184년~196년)

10대 내해 이사금 (196년~230년)

11대 조분 이사금 (230년~247년)

12대 첨해 이사금 (247년~261년)

김씨

13대 미추 이사금 (261년~284년)

석씨

14대 유례 이사금 (284년~298년)

15대 기림 이사금 (298년~310년)

16대 흘해 이사금 (310년~356년)

김씨

17대 내물 마립간 (356년~402년)

18대 실성 마립간 (402년~417년)

19대 눌지 마립간 (417년~458년)

20대 자비 마립간 (458년~479년)

21대 소지 마립간 (479년~500년)

22대 지증 마립간 (500년~514년)

23대 법흥왕 (514년~540년)

24대 진흥왕 (540년~576년)

25대 진지왕 (576년~579년)

26대 진평왕 (579년~632년)

27대 선덕여왕 (632년~647년)

28대 진덕여왕 (647년~654년)

29대 태종 무열왕 (654년~661년)

30대 문무왕 (661년~681년)

31대 신문왕 (681년~692년)

32대 효소왕 (692년~702년)

33대 성덕왕 (702년~737년)

34대 효성왕 (737년~742년)

35대 경덕왕 (742년~765년)

36대 혜공왕 (765년~780년)

37대 선덕왕 (780년~785년)

38대 원성왕 (785년~798년)

39대 소성왕 (798년~800년)

40대 애장왕 (800년~809년)

41대 헌덕왕 (809년~826년)

42대 흥덕왕 (826년~836년)

43대 희강왕 (836년~838년)

44대 민애왕 (838년~839년)

45대 신무왕 (839년)

46대 문성왕 (839년~857년)

47대 헌안왕 (857년~861년)

48대 경문왕 (861년~875년)

49대 헌강왕 (875년~886년)

50대 정강왕 (886년~887년)

51대 진성여왕 (887년~897년)

52대 효공왕 (897년~912년)

박씨

53대 신덕왕 (912년~917년)

54대 경명왕 (917년~924년)

55대 경애왕 (924년~927년)

김씨

56대 경순왕 (927년~935년)

한국의 역사

신라(新羅)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 시대의 삼국 중 하나로, 현재의 한반도 동남부 일대를 약 1000여 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국가이다. 기원전 57년에 건국하여, 935년 고려왕건에게 항복함으로써 56대 992년 만에 멸망했다.

역사

성립

신라는 처음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기원전 57년 건국되었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변의 가야소국들과 진한소국들과 함께 티격태격하던 신라는 4세기 내물 마립간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내물 이사금 때에는 해안가에 나타나던 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갔다.

발전

신라는 내물 마립간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5세기 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하였다.

지증 마립간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지방의 지배 세력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갔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제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팽창과 통일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구려가 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신흥 귀족인 김춘추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신라는 고구려백제에 대항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서서히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려 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 내부적으로 정치적 혼란에 있던 백제백제는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다시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더구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결국 고구려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668년 멸망하였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삼국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사비성을 점령(671년)하여 옛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676년) 하지만 옛 고구려의 영토인 한반도 북쪽과 만주 일대를 차지하지 못하고 이 지역에 발해가 들어서면서 불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였다. 따라서 삼국통일이라는 단어는 부적절하다고 하여, 혹자는 이를 "백제통합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통일신라의 전성기

백제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는 그 영역의 확대와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도 크게 증대되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도 안정되었다.

백제고구려 멸망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왕권이 전제화되었다는 점이다. 태종 무열왕은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와 그 장관인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신라 하대의 시작

8세기 후반 혜공왕 이후부터 신라에서는 왕권이 약화되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

진골 귀족들은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다.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무거워졌다.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졌다.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였다. 호족들은 농민 봉기를 배경으로 각처에서 일어나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반(半)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자기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 혹은 장군이라고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 지배력도 행사하였다.

한편,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혼란의 멸망기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사실상 신라는 완전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으며, 이 공백을 이용하여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궁예는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경주 일대로 축소되어 다시 삼국이 정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이후 신라는 더욱 약해져, 후백제견훤에게 금성을 점령당하고(927년), 경애왕이 살해 되는 등 사실상 국가의 수명이 다하였다.

고려 태조는 실각한 전(前) 임금인 궁예와는 달리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태조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과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경순왕의 자진 항복을 받아내어 신라를 무혈 정복할 수 있었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935년에 국권을 고려에 넘김으로서 992년의 긴 역사를 마감하였다.

신라의 정치

상대의 정치

중대의 정치

하대의 정치

신라의 사회,경제

소국 시대의 사회구조

발전기, 통일기의 사회구조

신라의 경제

신라의 상업은 고구려백제와는 달리 일찍 발달하지 않았다. 신라는 480년에 처음으로 금성에 시장을 열어 물건을 거래하기 시작했고, 509년금성에 동시(동쪽 시장)을 개설하였다. 이후 신라의 경제활동은 활발해졌으며, 특히 무역활동이 크게 번영하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오갈 정도였다.

신라는 시장을 관리·감독하기 위하여 시전(市典)이라는 관청을 별도로 두고 10명의 관리들이 관청 노비 등을 부리면서 시장의 열고 닫음, 세금 및 벌금의 징수, 도량형의 사용, 불량품 단속, 도둑질 단속 등을 해나갔다. 또 왕실에서 쓸 물품의 조달과 잉여 물품의 매각 등을 처리했다.

신라의 문화

고분과 금관문화

찬란한 불교문화

일상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