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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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정치, 역사

고대 한반도 동해안에 있었던 부족체를 일컫는 말. 세력권은 함경도~강원도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였다.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족속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의복만 약간 달랐을 뿐, 풍속과 언어는 고구려와 같았다. 사람들이 매우 강인하고 검소하고, 근면했다고 전해진다. 인구는 모든 부족을 합하면 전체적으로 2만여 호에 달하였다고 한다.

일찍부터 낙랑군옥저(沃沮)와 동예지역에 형식적으로 7개 현을 설치하였지만 직접적인 통치는 하지 않았고, 각종 작위와 호칭을 주고, 물물을 거래하는 등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한나라위나라에서는 고구려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동예에 각종 칭호와 거래를 한 듯하다.

2세기 후반 이후 동예는 고구려 지배하에 있다가, 245년 (魏)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낙랑군의 공격을 받고 다시 위나라의 간접적인 영향력에 놓였다. 동예의 세력 가운데 가장 큰 불내예후(不耐濊侯)는 위나라가 침입하자 투항하였고, 247년에는 위나라에 조공을 바쳐 불내예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거처는 읍락민 사이에 섞여 있어 뚜렷이 구분되지 못할 정도로 통치력이 미약하였다. 313년 낙랑군이 멸망된 뒤부터 다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고, 광개토 대왕 대에 대부분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경제, 사회, 문화

3세기에도 읍락(邑落)이 산과 하천을 경계로 구분되었으며, 함부로 다른 구역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만약 다른 읍락민이 구역 내로 침범하면 곧바로 소 ·말을 물리는 책화(責禍)를 하거나 생구(生口:노예)가 되어야 했다. 이것은 읍락 내부에 아직도 공동체 단위의 생활이 주로 영위됨을 반영한 것이다. 이에 따라 동예지역에서는 강력한 대군장(大君長)이 출현하지 못하고, 단지 후(侯) ·읍군(邑君) ·삼노(三老)가 각 읍락을 다스렸다.

농업을 주로 하였으며, 마포(麻布)와 양잠(養蠶) 기술이 발달하였고, 풀솜(명주천)을 만들기도 하였다 동예인은 별자리를 관찰하여 그해 농사의 풍흉을 예고하였고, 매년 10월에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밤낮으로 음식과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제천행사를 행하였는데,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와 같은 행사이다. 아픈 사람이 있는 집이나 죽은 사람이 나온 집은 버리고, 새로 집을 짓는 풍습이 있다. 특산물로는 반어피(班魚皮) ·표범가죽 ·과하마(果下馬) ·단궁(檀弓) 등이 알려졌다.

혼례와 장례는 고구려와 유사하였으며, 산과 강에 공동제사구역을 설정해 놓았으며, 이를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였다. 호랑이를 섬겨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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