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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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 기원전 2~3세기경에서부터 서기 3~4세기경까지 한반도 중남부 지역의 소국연합을 통칭하는 용어다. 마한, 진한, 변한 등이 있다.

삼한의 정치

  • 마한 54개국, 진한 12개국, 변한 12개국을 합하여 54개국이 있다고 '후한서'에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숫자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짐작하기 어렵다.
  • 부족장이나 소국의 임금에 대한 칭호는 '삼국지 위지 변진조'에 의하면 가장 높은 순대로 '신지, 검축, 번예, 살계, 읍차'등으로 기록되었다.

삼한의 경제

  • 주된 경제활동은 농경으로, 오곡과 벼가 대표적이다. 해안가에서는 고기를 잡았다. 누에와 뽕을 치기도 하였으며, 가축도 사육하였다.
  • 각 부족끼리의 거래 뿐만 아니라 일부 선진부족에서는 만주를 거쳐서 한나라와 간접적인 교역을 했다.
  • 부족원은 강력한 공동체적 질서로 엮어 있었는데, 예를 들면 '두레'와 같은 조직을 구성, 힙을 합쳐 농사를 지었다.

삼한의 사회

  • 삼한은 제정분리 사회로 별읍인 소도와 이를 주관한 것으로 추측되는 천군(天君)이 있었으며, 이들은 부족장이나 정치적 지배세력과 완전히 분리되어 종교지도자로서 기능을 했으리라 추측된다. 심지어는 정치지도력보다는 종교적 점복술을 더 신뢰하여 천군의 세력이 부족장을 넘어서는 일까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죄를 지은 사람이 소도에 도망치면 그를 돌려보내지도 않고, 그를 잡아가지도 못했다.
  • 소국에서는 부족장은 부족민과 노예를 다스렸지만 원시적인 수준에 벗어나지 못하였고, 관료제가 발달하지 못했다. 큰 나라에서는 원시적인 형태의 관료, 전쟁을 담당하는 군대 등 준국가적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 마한의 호수는 전체 10여만 호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토대로 삼한은 약 20여만 호가 있으며, 노예나 노비를 포함할 경우 더 많은 숫자로 짐작된다. 최대 200만 이상의 인구를 산정해 볼 수 있다.
  • 아직 도시와 촌락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았다.

삼한의 문화

  • 주거문화는 초가지붕의 반움집을 지었다.
  • 농경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면서 풍요를 위하여 파종 이후인 5월과 추수기인 10월에 기풍제와 추수감사제를 지냈다고 한다.
  • 한사군의 간접적인 영향으로 한자를 비롯한 기초적인 문자도 사용하고 있었다.
  • 남자는 흰 옷을 입고, 상투를 틀었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