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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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 고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대표한 국가. 한민족 역사의 근원을 이루는 국가. 1392년에 세워진 근세조선과 구분하기 위하여 '고조선'이라 칭한다.


개요

  • 존속시기: 비파형 청동기 시대 초기인 기원전 20세기 경(?)~기원전 108년, 혹은 기원전 107년, 혹은 기원전후 무렵 등 다양한 학설이 있음. 본 역사사전에서는 기원전 20세기 경 형성되었으며 기원전 108년에 붕괴한 것으로 예상.
  • 국가성격: 초기에는 부족 연합국가에서 후기에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한나라의 침공에 의해 멸망.
  • 영역: 완성된 고대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영역이라는 말보다는 세력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함. 여러 유물들의 출토 범위를 예측하여, 대개 북경 이북에서 남만주~한반도 북서부 일대까지 그 세력으로 짐작 함.
  • 수도: 왕검성. 왕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요서지방에서부터 한반도 평양이라는 설까지 다양한 학설이 존재한다.

역사

고조선의 역사는 아래와 같이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 형성단계

청동기 시대가 들어서면서 농업생산량이 증대되고, 잉여생산물이 나타나게 됨에 따라 잉여생산을 독점하는 지배계급이 발생하였다. [1]이런 자생적인 지배계급과 북방에서 흘러 들어온 세력이 연대하면서 두 세력이 연합한 정치세력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들 정치세력이 완만한 통합을 거쳐 후에 중국에서 '조선'이라 부르는 정치적 집단이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아직 후기 신석기 시대의 농경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정치성격도 느슨한 부족연합에 불과하였다. 이 당시 고조선의 세력권에서는 지배자가 죽으면 고인돌을 세웠다. 따라서 고인돌이 발견되는 범위가 대개 고조선의 정치적 영향력이 미치던 범위로 산정할 수 있다.

후기 발전단계

고조선은 완만한 발전을 거치다가 철기문화의 도입과 중국세력과의 접촉을 통하여 정치적,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게 된다.

일단 철기문화의 도입은 농업생산력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무기로 활용되어 정복전쟁을 낳게 되었으며, 부족간의 통합도 가속화 하였다. 그럼으로써 기존에 느슨했던 정치적 연대는 철기로 인한 통합으로 보다 강화되었다. 이 때 8조 법금과 같은 기초적인 율령이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8조 법금은 후에 60여개의 조항으로 발전한다.)

부족간의 통합이 가속화되면서 왕검성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치세력이 성립되었다. 이때가 기원전 4세기 경으로 짐작된다.

또한 중국세력과의 접촉은 연나라와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고, 고조선은 고대국가로 발전한 연나라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통합과 중앙집권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때 기본적인 관직과 관등서열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왕검성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치세력은 지방세력을 흡수, 통합과정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 고조선의 동북지역에서는 고조선의 초기 발전단계를 모방한 부여라는 정치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고조선의 남쪽에서도 진국이라고 통칭되는 소국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말기 고대국가 이행단계

고조선이 성장하자 진나라한나라의 중앙집권책에 반발한 중국 출신 귀족들이 고조선으로 망명하게 된다. 고조선은 이들을 서부지역에 상주케하고, 중국세력과의 완충지대로 활용하려고 한다. 이들 망명세력들은 고조선에 중국의 정치·사회·경제체제를 소개하여 철기문화를 더욱 확산시키고, 선진적인 지배시스템을 고조선에 보급하였다.

이들은 힘을 키워 왕검성을 급습함으로써 고조선의 정치권력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미 이들은 수 십년간 고조선의 영향력 아래 머물면서 고조선화 된 상황이었다. 과거 고조선의 지배세력이나 소국들과도 큰 마찰없이 정권을 교체하였다.

위만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력은 곧 고대국가로 이행하기 위하여 왕위 세습 체계 확립, 관료체제의 운영, 군사제도의 정비, 수취제도의 정비 등을 시행하면서 고조선은 한층 더 진보된 국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또한 대외원정을 시행하여 진번, 임둔 등을 복속하고 수천리에 달하는 세력권을 확보하였다. 또한 흉노와도 세력권이 맞닿을 정도로 힘이 강성하였다. [2]

그러나 중국 세력과의 충돌을 막지 못하고 기원전 109년 한나라의 침공을 받고 말았다.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1년 넘게 버텼으나 우거왕의 중앙집권책에 반대하는 이들의 반발로 우거왕은 살해되고, 왕검성이 함락되고, 고조선은 해체되기에 이른다.

우거왕을 살해한 세력들은 지방에 정치·경제적 기반을 둔 귀족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우거왕의 중앙집권책으로 그들의 정치·경제적 기반 상실을 두려워 한 것이다.

이렇듯 고조선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한나라의 공격으로 몰락하였으나, 고조선의 역사적 경험은 훗날 고대국가의 형성에 밑거름이 되었다.

이 당시 고조선한나라와 폭넓은 교역을 하였으며, 남쪽 진국을 비롯한 동방의 여러세력들은 한나라와 교역을 하고 있었는데, 고조선은 이들의 중개무역을 통하여 많은 이익을 차지하였다. 정치적으로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고대국가로 이행할 수 있는 경제력이 축적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정치

전기 정치체제

단군-대부족장-부족장으로 이어지는 느슨한 정치체제. 단군은 대제사장직을 겸하면서 고조선의 상징성을 드러내려 하였으리라 추측됨. 재야사학계에서는 단군이 대를 이어 세습되었다는 설을 펴고 있으나(47명의 단군), 아직까지 확인된 바는 없음.[3] 기초적인 법(8조 법금)을 공포하였으나 시행되었는지는 미지수임.

후기 정치체제

왕-태자-왕자 등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왕실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자 세습이 이루어지는 등 왕실을 지탱할 왕권도 충분하였다. 8조 법금에서 발전된 60여조에 이르는 법을 시행하고 있었음. 물론 지방에까지 제대로 시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음.

중앙관제

왕-비왕(부왕)-상·경(지방에 기반을 둔 대귀족), 대신(왕의 오른팔)-박사(왕권을 뒷받침 하는 관료집단), 장군(전문 군인)

지방체제

상·경(과거 대부족장 출신)-부족장-민-노비

고조선의 경제

  •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하였으나(고조선 시대 탄화미 출토) 안정적이지 않았고, 수렵과 목축으로도 경제력을 유지했으리라 짐작됨.
  • 후기에는 대규모 수리시설의 발전으로 충분한 경제력을 갖췄으리라 짐작됨.

고조선의 사회

왕검성을 벗어나면 부족사회가 펼쳐져 있으며, 초기에는 씨족공동체가 발전하였으나 서서히 해체되어가는 과정을 밟았다. 부족장은 민(일반백성)들을 다스렸으며, 전쟁으로 인한 다수의 노비가 부족의 최하계층으로 존재하였다.

또한 부족장이 정치적 지배자였다면, 종교적 지배자인 무당이 존재하여 '소도'를 중심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으리라 짐작한다. 또한 후기에 이르면 다양한 직업군이 발생하여 '상인', '장인'등이 최초로 나타났다.

고조선의 문화

  • 청동기 문화: 비파형 청동기를 위시하여 지배계층은 청동기를 사용하였다. 청동기는 햇볕을 받아 빛이 났고, 영롱한 청색을 띄어 그들의 권위를 세워주었다. 청동기는 장식의 의미가 컸다.
  • 고인돌(지석묘) 문화: 고인돌은 부족장이 죽었을 때, 만들어주는 무덤이다. 고인돌의 규모가 클수록 그 부족장의 세력이 강했음을 증명한다. 고인돌에는 각종 부장품과 순장된 사람들을 묻어, 이들이 부족장의 내세를 돌봐준다고 믿었다. 고조선의 세력권에는 북방식 고인돌이 주류를 차지하였다.
  • 철기문화: 고조선 후기인 기원전 4~5세기경에는 철기문화가 보급되는데, 철기는 강력한 무기로서의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변형과 주조도 쉬운 편이었다. 철기문화는 급속도로 확산되어 곧 부여진국에게도 보급된다. 철기는 사실상 석기로 의존하던 무기류와 농기구류를 대체하여 전쟁과 경제분야에서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철기로 인한 정복전쟁은 곧 고대국가로 가는 지름길이 되었다.

역사 귀속문제

현재 고조선은 중국사학계와 마찰을 빚고 있다. 중국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이 진나라한나라의 지방정권이므로 고조선을 중국사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본 역사사전은 고조선은 명백하게 중국 대륙문명과는 다른 독자적인 '동방문명'을 성립시켰으며, 이는 수많은 고고학적 발굴로 증명되는 것이다. 다만 고조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중국측 기록에 한정된 측면으로 인하여 중국에게 유리한 기록(조공과 같은)들이 존재할 따름이다. 몇몇 기록만으로는 당시 중국 진나라, 한나라와는 확연하게 다른 고조선의 사회·경제·문화적 측면들을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후대 중국측 사료에서도 고구려발해, 백제, 신라 등의 나라들이 고조선과 맥을 함께하는 나라로 소개하고 있다. 이들 나라들의 역사적 맥락을 다시 고려조선이 잇고 있으며, 이들의 역사를 고스란히 잇고 있는 것이 우리 한민족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역사는 한민족의 역사로 귀속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각주 및 참고자료

  1. 단군신화 참조
  2. '염철론'이라는 책의 '비호'라는 부분에 보면 "조선은 요를 넘어 연나라의 동쪽 땅을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진나라한나라의 교체기에 쓰여진 책이다.
  3. 한단고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