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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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의 위치와 변화

본래 요동은 중국세력이 '요하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쓴 단어였다. 중요한 것은 요하라는 강은 '멀리 떨어진 강'이라는 중국인의 관념으로, 시대에 따라서 달라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동이니 요하니 하는 지명은 절대적인 지명이 아니라 상대적인 관념적 지명이었다. 초기의 요하는 북경일대의 '난하'로 추정된다.

하지만 중국세력이 확장하면서 요하는 차츰 동쪽으로 옮겨졌으며, 어느 시점에서부터 지금의 요하로 굳어졌다. 그리하여 지금의 요동반도 인근을 요동이라고 칭한다. 그 시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이 요동지역은 초기에는 고조선한나라가 격돌한 곳이며(당시에는 요하라고 부르지 않고, '패수'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는 한나라낙랑군현도군을 설치함으로서, 이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이곳은 치열한 격전지가 되었고, 중국세력과 공손씨세력, 고구려, 부여 등이 각축을 벌였다.

중국5호 16국 시대에 접어들자, 이 지역은 고구려의 영향력이 강해졌으며, 요서지역에 위치한 연나라도 이 지역을 두고 각축을 벌였다. 그러다 광개토 대왕 이후에는 완전히 고구려세력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고구려는 요동에 수많은 성을 세우고 대 중국 방어선으로 하였다. 이곳은 농사와 물류가 풍부해, 이곳을 차지한 고구려는 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수나라당나라가 침공할 때, 고구려는 요동방어선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당나라가 직접 통치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고, 결국 고구려 계열인 '소고구려국'이 요동지역을 통치하다가 발해가 9세기 무렵에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이후 10세기 초반 거란족이 요동을 장악하고, 발해를 멸망시켰으며, 훗날 금나라청나라의 근거지가 되기도 한다.

요동은 중국세력의 동쪽 한계선이며, 요동지역은 만주와 중국 동북지역 통치의 중심지였다. 이곳을 중국세력이 점령하면 동북지역에 위치한 많은 나라들과 민족들을 견제할 수 있으며, 이곳을 중국이 잃으면 이민족의 위협을 받았다. 따라서 전략적 요충지로서 그 기능이 매우 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