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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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역대 왕계표
  1. 온조왕(기원전 18년~서기 28년)
  2. 다루왕(28년~77년)
  3. 기루왕(77년~128년)
  4. 개루왕(128년~166년)
  5. 초고왕(166년~214년)
  6. 구수왕(214년~234년)
  7. 사반왕(234년)
  8. 고이왕(234년~286년)
  9. 책계왕(286년~298년)
  10. 분서왕(298년~304년)
  11. 비류왕(304년~344년)
  12. 계왕(344년~346년)
  13. 근초고왕(346년~375년)
  14. 근구수왕(375년~384년)
  15. 침류왕(384년~385년)
  16. 진사왕(385년~392년)
  17. 아신왕(392년~405년)
  18. 전지왕(405년~420년)
  19. 구이신왕(420년~427년)
  20. 비유왕(427년~455년)
  21. 개로왕(455년~475년)
  22. 문주왕(475년~477년)
  23. 삼근왕(477년~479년)
  24. 동성왕(479년~501년)
  25. 무령왕(501년~523년)
  26. 성왕(523년~554년)
  27. 위덕왕(554년~598년)
  28. 혜왕(598년~599년)
  29. 법왕(599년~600년)
  30. 무왕(600년~641년)
  31. 의자왕(641년~660년)
한국의 역사

백제(百濟)는 한국의 고대 국가이다. 후에 국호를 남부여라고 바꿨다.

역사

건국

백제는 기원전 18년부여 또는 고구려 계통의 유민 세력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는데,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고구려 유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나라 세력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차츰 성장해 나갔다. 3세기 중엽 고이왕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중국 대륙의 선진 문물들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사실상의 율령 반포)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발전

4세기 중반 백제는 근초고왕 때 크게 발전하였다. 이때 백제는 마한의 나머지 세력을 모두 정복하여 그 영토가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또한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황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점차 전제군주화가 되어가고 부자 상속에 따른 왕위 계승이 확립되었다. 아울러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융성

4세기 근초고왕마한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고 고구려로 북진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남제서북제서에 따르면, 근초고왕요동산동반도까지 진출하였으며 일본 열도의 규슈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5세기 이후 고구려장수왕에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으며, 문주왕 때는 해구와 같은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여 정치혼란이 일어나는 등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그러나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명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 대륙의 남조(南朝)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또한 일본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왕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지만, 얼마 안 가 배신한 신라에게 빼앗기고 성왕 자신도 신라군과 싸우다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쇠망

고구려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백제에서도 무왕의자왕신라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의자왕 2년에는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성 40여개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에 신라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삼국를 통일하려 하였다. 이에 고구려와 백제는 남북동맹으로 나당동맹에 대항하려 하였다.

신라당나라와 연합하여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 당시 백제는 의자왕 후기(655년 이후)부터 시작된 정치적 혼란으로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허무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이 들고 일어나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결국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고 만다.

이때 일본이 백제에 원군을 보내,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백제-일본 연합군이 백촌강에서 격돌하였다 (백촌강 전투). 그러나 백제-일본 연합군은 대패하고, 최후의 거점인 임존성이 배반한 '흑치상지'에게 점령당함으로서 백제의 부흥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663년)

요서중국대륙 영토에 대한 논란

백제가 중국요서지방에 진출했었다는 이른바 ‘백제요서경략설’은 송서, 양서 등의 남조계 사서에서 비롯한 것이다. 다만 지리적으로 요서지방과 인접한 북조계 사서에서는 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학계에서 지속적인 논란이 되어왔다.

일반적으로는 백제의 요서진출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학계의 시각이 대세이지만(대표적인 예로 〈백제의 요서영유(설)〉(유원재, 1995년,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132~150쪽), 최근에는 다시 백제의 요서 진출을 신중하게 실재한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도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4세기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강종훈, 2003년, 〈한국고대사연구〉30, 한국고대사학회, 5~37쪽)이 있다.

백제가 요서산동반도 지역을 직접적으로 지배했다기보다는 무역이나 기타의 이익을 위해서 주요 거점지역에 백제계가 상당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백제의 정치

백제는 일찍이 중국 주나라 육전(六典) 제도를 본떠서 삼국 중 제도정비를 가장 빨리 시작하였다. 고이왕 때부터 왕 밑에 6좌평과 16관등급 제도를 두어 행정을 맡게 하고, 또 왕의 바로 밑에는 수상격인 상좌평(上佐平)을 두어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 관청의 장관들은 3년마다 선거로 뽑았다. 성왕 때 사비로 천도(538년)한 이후에는 내관(內官:12부)과 외관(外官:10부)으로 이루어지는 22부의 중앙관서를 새로 두었다. 중앙의 행정구역은 상·하·전·후·중의 5부로 구분하고 부 밑에 항(巷)을 두었으며 각 부에는 500명의 군인이 주둔하였다.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은 웅진시대까지 담로제(擔魯制)였다. 《양서(梁書)》의 <백제전>에 따르면 전국에 22담로를 두고 왕자나 왕족을 보내어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담로는 지방지배의 거점으로서 성을 뜻하는 동시에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일정한 통치영역을 나타내는 것이며, 일종의 봉건제라고 할 수 있다. 담로의 설치에 대해서는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로 보기도 하지만 근초고왕이 지방지배조직을 정비하고 지방관을 파견하기 시작한 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2개라고 한 것은 웅진에 도읍하던 때의 것으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천이 있었으며 백제 영토가 확대되었을 때에는 50여 개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비성으로 천도 후,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은 5방제(五方制)로 변경되었다. 5방은 중앙인 고사성(古沙城), 동방인 득안성(得安城), 남방인(久知下城), 서방인 도선성(刀先城), 북방인 웅진성(熊津城)이었다. 각 방에는 방령(方領) 1명, 방좌(方佐) 2명이 파견되었다. 각 방은 6~10개의 군(郡)으로 이루어졌다.

백제 16관등(삼국사기)

  • 1품 좌평-2품 달솔-3품 은솔-4품 덕솔-5품 한솔- 6품 나솔(자줏빛 관복, 은으로 된 꽃을 관에 장식할 수 있음)
  • 7품 장덕-8품 시덕-9품 고덕-10품 계덕-11품 대덕(붉은 관복)
  • 12품 문독-13품 무독-14품 좌군-15품 진무-16품 극우(푸른 관복)

백제의 사회, 경제

백제는 일찍이 농업이 발달하여 삼한시대부터 벼농사가 발달하였고, 직조술 ·염색술 등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금속공업도 발달하여 무기 ·금관 ·금은 장식품 ·불상 등을 만들었다. 토지제도는 국유가 원칙이고 토지의 측량방법은 두락제(斗落制)를 썼으며 조세는 조(租)를 쌀로, 세(稅)를 포 ·비단 ·삼베 등으로 바치게 하였는데 그 징수 방법과 수량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다.

백제는 기본적으로 해양민족적 성격을 지녀 중국일본과 교역이 성행하였으며, 일본에 말·누에·직조법·양조법 등의 생산품과 그 기술이 전파되었다. 백제의 무역항으로는 영암(靈岩) 및 당항성(黨項城)이 크게 번성하였다.

한편 백제는 수도 고마성에 관설 시장을 만들었고 도시부(都市部)라는 시장감독관청을 두어 시장의 열고 닫음, 상거리 질서 유지, 분쟁 조정 및 불법 거래를 단속했으며, 세금을 징수하고 왕실에서 쓸 물건을 조달하게 하였다.

백제와 일본의 관계

백제는 근초고왕 때 최초로 일본에 한학을 전하고, 근초고왕 또는 아신왕왕인 박사가 논어(論語)와 천자문을 전했으며, 무령왕 때 단양이 ·고안무, 성왕 때 유귀(柳貴) 등은 오경박사(五經博士)로서 한학과 유학 등을 전하였다. 그리고 무왕 때 관륵(觀勒)은 천문 ·역법 ·지리 등을 전하고, 성왕 때(552년) 노리사치계는 최초로 불교를 전했으며, 혜총은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고, 도장은 성실론(成實論)을 저술하였다. 아좌 태자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 밖에도 화공(畵工) ·와공(瓦工)과 경사(經師) ·율사(律士) ·의사들을 보냈다. 이와 같이 삼국 중 백제문화는 일본의 문화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또한 당시 주요 일본 왕족이 백제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문화적, 정치적'연결고리가 663년, 일본백제를 구원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