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 연합군
결성배경
신라는 642년 이후 백제 의자왕의 지속적인 공격에 나라가 흔들리고 있었다. 대 백제 주요 거점인 대야성은 점령당했고, 심지어 한강 유역의 최후 보루인 당항성(당성)도 고구려-백제의 협공에 놓이는 상황이었다. 내부적으로는 귀족들의 반란인 비담·염종의 난이 일어나 나라가 어수선하였다. 이런 국난을 자체적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웠으며, 가장 심각한 백제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부의 힘을 빌려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 접근하여 백제 공격을 논의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당나라에 손을 벌린다.
당나라 또한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끊임없이 소모되고 있었다. 당나라는 대 고구려 전쟁(고당 전쟁)을 마치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할 세력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당나라의 사정을 꿰뚫은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켜주는 대가로 고구려 공격을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군사동맹을 맺게 된다. 신라는 당나라의 군사력으로 최대 관건인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으며, 당나라는 신라의 지원으로 고구려를 손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영토 분배는 신라는 대동강 이남(사실상 백제 영토), 당나라는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기로 약속한다.
주요 군사적인 지휘권은 당나라가 가졌으며, 신라의 지휘권은 당나라의 지휘권에 예속되었다.
대 백제 공격
신라는 당나라에게 지속적인 백제 공격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660년 여름에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서 13만 대군을 동원하게 된다. 당나라의 군대는 수군으로 움직였다. 신라는 김유신의 인솔 아래 5만의 병력과 당나라군에게 지급할 군량미를 가지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는 나라가 어수선한 상태에서 수륙으로 대군을 맞이하자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하였다. 당나라 군대의 상륙을 막으려던 백제는 백강 하구에서 패배하였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도 황산벌에서 계백을 물리치고 사비성에 육박하였다. 백제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난하여 저항을 하려고 하였으나, 상황이 글렀음을 알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신라군이 황산벌에서 계백의 끈질긴 저항으로 예정된 날짜보다 늦게 사비성에 도착하였다. 당나라 군 총사령관인 소정방은 이에 신라장군들을 문책하려 하였으나, 김유신의 강력한 반발로 문책을 하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연합군의 내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나라는 약속과 달리 옛 백제 땅에 5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를 당나라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나당 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켰지만, 곧이어 일어난 백제 부흥운동에 직면하게 되었다. 나당 연합군은 백제 부흥군에 맞서서 옛 백제 영토 전역에서 3년 간의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또한 일본의 지원군도 맞서 싸워야 했다. 결국 663년이 되어서야 나당 연합군은 백제 영토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다.
대 고구려 공격
나당 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킨 이듬해인 661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소정방을 총사령관으로 한 당나라 군 35만은 평양성으로 향했다. 신라 김유신도 당나라군의 군량미를 이끌고 고구려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소정방의 군대는 고구려에 대패하였고(사수 전투), 김유신이 간신히 평양성 인근에 도착한 661년 12월에는 이미 후퇴를 결심하였다. 비록 이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못했지만, 이제 당나라는 신라의 지원 아래 손쉽게 평양성까지 진격할 수 있으며, 고구려는 양쪽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동시에 막아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667년 연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하자,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 총공격을 감행한다. 667년 말에 설인귀를 총사령관으로 한 나당 연합군의 총 공격은 북에서는 당나라의 54만 대군이 고구려를 향해 쳐들어왔으며, 남에서는 신라의 27만 대군(신라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음)이 고구려를 동시에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보장왕은 668년 봄에 항복을 선언하고 만다.
연합군의 붕괴
당나라는 고구려 영토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고, 사실상 당나라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신라를 노골적으로 협박하면서 신라 문무왕에게 '계림 도독'으로 삼고, 경주를 '계림 도독부'로 지칭하는 등 사실상 신라마저 삼킬 야욕을 보인다.
신라는 이에 저항으로 맞선다. 670년 신라 김유신은 소정방을 죽이고, 신라군은 옛 백제지역을 차지하기 위해서 공격을 감행한다. 나당 연합군은 이렇게 붕괴하였다.
곧이어 신라와 당나라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671년 사비성이 신라군에 떨어지고, 신라는 옛 백제지역을 점령한다. 또한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당나라 군대를 괴롭혔다. 당나라는 임진강 유역에서 신라를 여러 차례 공격하였으나, 675년 매소성 전투에서 20만 대군이 대패하고, 이듬해 676년 기벌포에서 수군이 궤멸함으로써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당 연합군은 결과적으로 신라의 백제 통합을 위한 전쟁이 되어 버렸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는 끝내 손에 넣지 못하고, 발해에게 넘겨주었다. 반면 신라는 백제영토를 합병했을 뿐만 아니라, 흔들리는 나라를 잘 추스리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최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는 사대적 정치세력이 최초로 등장하는 모습이 바로 나당 연합군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