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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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고구려를 건국한 임금. 생몰연대(?~918년), 재위(894년~918년)

궁예는 신라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나, 어릴 때 왕권 다툼의 과정에서 배제되어 세달사로 피난하였다. 그는 세달사를 나와서 양길 휘하에 들어가 행보를 시작했다. 양길 휘하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독자적으로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그의 군대가 명주(현재 강원도 영동지역)에 이르자, 명주는 바로 그에게 항복한다. 그는 명주를 점령한 이후 서북쪽으로 진군하여 철원을 점령하고, 이곳을 수도로 삼아 왕을 칭하다. 이후 계속 서진하여 송악(개성)을 점령하고, 그곳의 호족들을 포섭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자신을 길러준 양길을 격파하여 나라의 기반을 세운다. 그리하여 그는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한다. 후고구려의 건국이다. (901년)

수도는 송악이었으며, 그는 왕건을 필두로 하는 패서호족들과 충청도 호족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다. 또한 북벌을 감행하여 평양을 정복하는 등 고구려의 계승을 대외적으로 선언하였다. 이후 904년에는 나라이름을 마진으로 바꾸고, 905년에는 철원으로 수도를 옮긴다. 이는 패서호족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강력한 군주로 발돋음 하려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미륵불을 자처해 백성들의 환심을 사고, 불교이념으로 왕권을 강화시키려 하였다.

909년에는 왕건을 시켜 나주를 점령하게 하였고, 충청도 지역을 석권하여 후백제를 압박하고, 남으로는 신라의 주요 요충지를 점령하는 등 군사적으로 매우 강성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911년에는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고치고, 전제왕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이는 호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그는 918년 왕건을 필두로 하는 호족세력들의 공격에 무너졌다.

재평가

그는 한국사에서 매우 포악한 군주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과장이라는 설이 많다.[1] 그는 철원에서도 백성들과 왕궁을 바로 곁에 두어 백성들의 소리를 들으려 애썼으며, 중국에서는 사용하지 않은 수덕만세, 정개, 부태, 성책 등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적인 면을 과시하였다. 또한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하려 애썼다. 주로 왕건은 호족들이 지지, 궁예는 민중들이 지지하였다.[2]

각주

  1.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부석사에서 신라 왕의 초상에 칼을 꽂는 등 철저히 반신라적 정책을 펼쳤다. 그리하여 김부식은 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하려 애쓴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2. 슬픈궁예(2002년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