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신라 역대 왕계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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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정벌
진흥왕은 541년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고, 대외정복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550년, 고구려와 백제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이자, 그 틈을 타서 두 성을 모두 점령하였다. 551년에는 거칠부를 시켜 백제와 함께 고구려에 대한 전면공세를 가했다. 그리하여 죽령 이북~철령 이남에 이르는 10군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553년에는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지역을 기습하여 빼앗아, 중국과의 직접 교통로를 확보하였다. 이에 백제 성왕은 관산성 전투를 통해서 만회하려 하였지만, 신라는 백제 성왕을 죽이는 대승을 거둔다.
신라의 공세는 가야지역에도 이어져, 아라가야를 정복하고(연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음) 562년에는 대가야마저 정복하여 가야연맹을 흡수하였다. 진흥왕은 이곳에 대야주를 설치하고, 백제 공격에 굳건히 대비하였다. 북으로는 함경도까지 일시 진출하였다. 민심을 수습하고, 확장된 강역을 확인하기 위해 북한산(北漢山)·창녕(昌寧)·황초령(黃草嶺)·마운령(磨雲嶺) 등에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다.
대내안정과 불교 진흥
진흥왕 치세 초기에는 진흥왕이 어리기 때문에(7세에 즉위) 법흥왕비가 섭정을 하였다. [545년]] 거칠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신라의 역사서인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고, 왕실의 권위를 위하여 불교를 크게 중흥시켰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절이 황룡사이다. 진흥왕은 스스로를 전륜성왕이라고 생각했으며,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생을 마쳤다. 진흥왕은 법흥왕과 마찬가지로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개국(開國)·대창(大昌)·홍제(鴻濟)등이 그것이다. 또한 화랑도를 만들어 부족국가 시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청년집단을 왕에게 충성하는 군사조직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