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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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甄萱, 867년 ~ 936년 9월, 재위: 892년 ~ 935년 3월)은 후백제의 시조이다. 아자개와 상원부인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자신의 성을 이씨에서 견씨로 고쳤다. 후백제를 건국하여. 신라고려를 압박하여 후삼국시대 잠시 동안 패권을 장악하였다. 후에 고려왕건에게 귀부하고 스스로 건국한 후백제를 멸망시킨다.

어린 시절

《삼국유사》에 실린 이제가기의 기록에 따르면 견훤은 지렁이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도 수록된 다른 전설에 의하면 견훤이 아직 아기였던 시절, 아자개가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어머니는 아자개에게 식사를 갖다 주려고 어린 견훤을 나무 아래 잠시 두었다. 그랬더니 그 사이 호랑이가 나타나 견훤에게 젖을 먹였다고 한다. 견훤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인 남원부인과 좋지 않은 관계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장성하여 군에 들어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는 서남해에 배정되었다. 창을 베개삼아 적을 기다리는 그의 용맹은 특출했고, 곧 그 자질을 인정받아 비장이 되었다.

건국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혼란이 극에 달하던 진성왕 6년에 견훤은 봉기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西南(서남)쪽의 州縣(주현)들을 進擊(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메아리쳐) 呼應(호응)하여 그 무리가 달포 사이에 5,000여 명에 달하였다.[1]"는 것이다. 그는 곧이어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무진주를 점령하였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외부에 내세우지는 못하고 '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이라고 자칭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양길에게 궁예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양길에게 비장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어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하고,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드러내고자 순행을 떠나 완산주에 이르자 주민들이 크게 환영하였다. 완산주에서 견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三國(삼국)의 起源(기원)을 상고해 보면, 馬韓(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赫世[혁세:赫居世(혁거세)]가 勃興(발흥)하였으므로 辰(韓)[진(한)]·卞(韓)[변(한)]이 따라 일어났다. 이에 百濟(백제)는 金馬山(금마산)에서 開國(개국)하여[歷史(역사)의 錯覺(착각)] 600여 년이 지났는데, 摠章(총장) 年間(연간)에 唐高宗(당고종)이 新羅(신라)의 請願(청원)을 받아들여 將軍(장군) 蘇定方(소정방)을 보내어 船兵(선병) 13만 명으로써 바다를 건너게 하고, 신라의 金庾信(김유신)도 黃山(황산)을 거쳐 泗沘[사비:扶餘邑(부여읍)]에 이르기까지 휩쓸어 唐軍(당군)과 合勢(합세)하고 백제를 攻滅(공멸)하였다. 지금 내가 都邑(도읍)을 完山[완산:全州(전주)]에 정하고, 어찌 감히 義慈王(의자왕)의 宿憤(숙분)을 씻지 아니하랴."

이 때 비로소 견훤은 백제왕을 칭하였고, 자신이 세운 나라의 제도와 관직을 정비하였으며, 중국 강남의 오월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 때는 신라 효공왕 4년, 서기 900년이었다. 견훤의 발언에서 당시 신라가 백제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 수 있다. 백제인들에게 신라는 정통성 있는 지배자가 아니라 정복자였고, 따라서 백제를 재건하고 신라를 쳐 없애 분을 풀어야만 한다는 방식의 사고가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이듬해에는 대야성(합천)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903년에는 금성 일대의 10여 군현을 왕건의 수군 기습에 의해 빼앗겼다. 906년에는 상주의 사화진 일대에서 왕건과 싸워 패전하였다. 다시 909년에서 91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에는 왕건과 나주를 놓고 해상과 육상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나 결국 패전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912년에는 견훤이 궁예와 덕진포(德津浦), 이병도에 따르면 비풍군 덕진현(삼국사기 잡지 제5 지리 3 신라 참조)에서 싸웠다고 한다. 이 전투의 승패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왕건과의 혈전

918년 태봉에서 왕건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고 나라의 이름을 고려로 바꾸자, 축하사절을 보내어 공작선과 지리산 대나무 화살로 선물을 삼아 왕건에게 주었다. 태봉 말기에 이흔암이 공격, 점령하고 있었던 웅주는 이흔암이 왕건의 반란으로 인해 철원으로 상경하자 백제에 항복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 해 9월 상주의 반란군 수령이라는 아자개(阿字蓋)가 왕건에게 항복하였고, 왕건은 이 인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친히 항복을 받아들이는 의식을 집전하기 위해 정전 뜰에서 의례를 연습하다가 의례를 어긴 자들을 귀양보내기도 하였다. 이정도로 아자개라는 인물을 후대하였으므로 이 아자개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라는 설이 유력하다.

920년에는 대야성을 드디어 함락시켰다. 곧 진례성(청도)으로 진격하였으나 신라가 고려에게 구원을 청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견훤은 퇴각하였다.

924년 7월에는 아들 수미강을 보내어 대야, 문소(의성) 두 성의 군사로 조물성(김천시 조마)을 공격하게 했으나, 조물성 사람들이 태조를 위해 성을 굳게 지켜 함락하지 못하였다. 8월엔 절영도의 준마를 태조에게 보냈다. 이듬해 10월엔 기병 3000으로 조물성을 내습하였고 왕건은 반격에 나섰다. 이 전투에서 견훤은 매우 유리했던 것 같다. 왕건은 참패를 면하고자 화친을 청하며 인질로 사촌아우 왕신을 보내었고, 때마침 왕건에게 유금필군이 합류하자 그의 용맹함과 강병을 두려워한 견훤도 이에 응해 외조카 진호를 인질로 보내었다. 곧이어 12월 거창 등 신라의 20여성을 공취하였고, 후당에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였다. 후당은 백제왕의 관작을 봉해주었다. 926년 4월 고려에 인질로 보낸 조카가 급사하였다.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왕신을 죽이고 웅진 방면에서 진격하였다. 왕건이 웅진 방면의 성주들에게 성을 고수할 것을 명하여 견훤은 웅진방면에서는 큰 소득을 얻지 못한 것 같다. 전투에 앞서 견훤은 앞서 보낸 절영도의 총마를 돌려달라고 고려에 요구하였다. 이는 견훤이 "절영도의 명마가 고려에 가면 백제가 멸망한다"는 도참을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2]. 이는 궁예나 왕건만큼은 아니지만 견훤 역시 도참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본격적인 전쟁 927~934

공산동수 전투까지

927년에는 고려와 백제 사이의 전쟁이 매우 치열하였다. 고려는 1월 용주(예천 용궁)를 공격, 왕건이 친히 항복받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다. 이 승리 이후 전쟁의 전반부에선 고려가 우세하였다. 3월엔 왕건이 운주(홍성)의 성주 긍준을 고려군이 격파하였다. 같은 달 상주 일대의 근품성을 고려군이 함락시켰다. 4월에는 고려의 수군장군 영창, 능식이 강주를 공격하기 위해 남해안에 상륙하였으며, 전이산(남해), 노포평, 서산, 돌산(여수)를 공격하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서쪽 전선에서는 왕건이 웅주를 공격하였으나 공성에 실패하였다. 7월에는 대야성에서 고려의 장수 재충, 김락이 성을 함락하고 장군 추허조 등을 포로로 삼았다. 강주의 북쪽인 대야성이 함락되어 고려에서 강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된 8월에는 왕건이 강주를 순행하였다고 한다. 순행을 틈타 고사갈이성(문경) 성주 흥달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는 등 백제의 부근 성주들이 상당수 투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9월엔 전황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우선 근품성을 함락, 파괴하였는데 이는 강주에 이르기까지 남쪽으로 길게 늘어진 고려군의 허리를 끊는 작전으로 보인다. 곧이어 고울부(영천)을 함락하자 신라왕은 연식을 보내어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건은 시중 공훤 등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견훤은 단숨에 신라의 수도 서라벌로 단숨에 들이닥쳐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서는 경애왕을 협박, 자살케 했으며 경애왕의 왕비를 강간하게 하였고 부하들에게 궁녀들과 간음케 하였으며 병사들에게 약탈을 마음대로 하라고 명하였고 장인들과 병기, 보배들을 또한 약탈하여 돌아갔다고 한다. 견훤은 왕의 외종제인 경순왕을 새 왕으로 임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크게 노하여 기병 5천을 이끌고 공산동수 지역에서 견훤과 대회전을 펼쳤다. 왕건측의 병력은 앞서 보낸 1만명에 이들 5천을 더해 1만 5천은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견훤측은 대승리를 거두었고, 신숭겸이 왕건으로 변장하여 대신 죽게 할 정도로 왕건을 참패시킬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신숭겸 김락 등 고려의 여덟 장수가 백제군에게 죽어 지역의 지명이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바뀌었다 하며, 주변 지명엔 왕건의 다급한 상황을 전해주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전투를 공산전투 혹은 동수대전이라고 한다. 이 대승리를 통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견훤은 같은 달 대목군(칠곡군 약목)을 탈취하고 곡식을 불사르거나 거두어갔다. 소목군(구미시 인동?)에도 역시 마찬가지 일을 다음 달에 행하였다. 10월에서 11월 사이에는 완강히 고려를 지지하던 벽진군(성주)을 공격하였고, 벽진군을 함락시켰다는 기사는 없으나 장군 색상이 전사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벽진군의 군사적 능력은 거의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다시금 경주로 가는 길이 확보되었고, 또한 남으로 강주까지 늘어진 고려군의 허리는 잘리게 되었다. 12월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최승우를 시켜 짓게 하여[3] 왕건에게 보낸다. 최승우가 언제 봉직하였는지는, 그리고 이 글 이외에 어떤 활동을 백제를 위해 했는지는 기록에 명확히 나타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시기에 백제에 봉직하였던 것은 확실하며, 따라서 신라에 대한 강경한 정책은 6두품 출신으로 백제에 봉직할 정도로 신라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최승우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전번에 [新羅(신라)] 國相(국상) 金雄廉(김웅렴) 등이 장차 足下(족하)를 서울로 불러들이게 하였으니, 이는 (마치 작은) 자라(高麗(고려)에 비유)가 큰 자라[黿(원:新羅(신라)에 비유)] 소리에 應(응)하고, 종달새(高麗(고려)와 新羅(신라)에 비유)가 새매(後百濟(후백제)에 비유)의 날개를 헤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반드시 生靈(생령)을 塗炭(도탄)에 빠뜨리고, 宗社(종사)를 廢墟[폐허:丘墟(구허)]로 만들게 하는 것이오. 이러므로 내가 먼저 祖鞭(조편)[4]을 잡고 홀로 韓鉞(한월)[5]을 휘둘러 百僚(백료)에게 白日(백일)을 가리키며 맹세하고 6部(부)를 說諭(설유)하되 義風(의풍)으로써 하였더니, 뜻밖에 奸臣(간신)이 도망가고 國君(국군)이 薨變(훙변)을 당하였으므로 마침내 景明王(경명왕)의 表弟[표제:外從弟(외종제)]요 獻(憲)康王(헌강왕)의 外孫[외손:金傅(김부)]을 받들어 王位(왕위)에 오르도록 권고하여 위태로운 나라를 재건하고, 임금을 잃었으나 (뒤를 잇는) 새 임금이 섰소. (그런데) 足下(족하)는 忠告(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流言(유언)을 들어 百計(백계)로 [新羅(신라)의 王位(왕위)를] 엿보고 多方(다방)으로 침노하였으나 오히려 나의 말머리를 보거나 나의 쇠털을 뽑지 못하였소. 겨울 初(초)에 都頭(도두) 索湘[색상:麗將(여장)]이 星山陣(성산진) 아래에서 손이 묶였고, 月內(월내)에 左將(좌장) 金樂(김락)은 美理寺[미리사:達城郡(달성군)] 앞에 骸骨(해골)을 드러냈으며, (그 밖에) 殺獲(살획)이 많고 追後(추후)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으니, 强弱(강약)이 이와 같아 勝敗(승패)를 가히 알 수 있을 것이오. 나의 기약하는 바는 활을 平壤門樓(평양문루)에 걸고 (나의) 말에게 浿江[패강:大同江(대동강)]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오. 그러나 前月(전월) 7일에 吳越國使(오월국사) 班尙書(반상서)가 와서 왕의 詔書(조서)를 전하기를, '卿(경)이 高麗(고려)와 더불어 오랫동안 和好(화호)를 통하고 서로 鄰盟(인맹)을 맺었다는 것을 들었는데, 근래 볼모 둘이 다 죽음으로 해서 드디어 和親(화친)의 舊好(구호)를 잃고 서로 地境(지경)을 침략하여 전쟁을 그치지 아니하므로, 지금 일부러 사신을 보내어 卿(경)의 本道[본도:本土(본토)]로 가게 하고, 또 高麗(고려)에도 보내니 각기 서로 親睦(친목)하여 길이 福(복)을 누리게 하라' 하였다. 나는 尊王(존왕)의 義(의)를 두터이하고 事大(사대)의 情(정)을 깊이 하였으므로 지금 (吳越(오월)의) 詔諭(조유)를 듣고 그대로 따르려 하나 항상 足下(족하)가 [戰爭(전쟁)을] 罷(파)하려 하면서도 못하고, 困(곤)하면서도 오히려 싸우려고 함을 (내가) 염려하여 지금 그 詔書(조서)를 謄寫(등사)하여 보내니 留意(유의)하여 詳悉(상실)하기 바란다. 또 토끼와 날랜 개가 서로 지칠 대로 지치면 마침내 반드시 비웃음을 남길 것이요, 큰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면 역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迷復(미복)[6]을 경계로 하여 後悔(후회)를 스스로 끼침이 없게 하라."

견훤의 패권과 그 붕괴

이렇게 이어진 일련의 군사 행동을 통해 왕건이 직접 순행하여 고려의 영토로 만들었던 강주는 고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928년 정월엔 강주를 구하러 가던 고려의 원윤 김상, 정조 직량 등이 초팔성(합천 초계)의 성주 흥종에게 공격받아 전사했으며, 5월엔 강주 원보 진경 등이 고자군에 양곡을 운반하러 간 사이에 견훤이 강주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진경은 패배하였고 장군 유문 등은 항복하였다고 한다. 한편 정월에는 왕건이 장문의 편지로 견훤의 편지에 답하였다. 강경한 전투 의지가 담겨 있는 서찰이었다. 강주는 고립되었고 928년 5월엔 결국 무력화되었으므로 왕건은 공격방면을 전환하려 시도하였다. 4월에 왕건은 탕정군(아산)으로 진출하였으며, 7월 삼년산성(보은)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패배하였고, 청주로 퇴각하였다. 이처럼 서부전선의 대치 상황은 매우 견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이 8월엔 충주로 이동하여 다시 경상도 일대의 전선을 노리기 시작하였으며,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장군 관흔으로 하여금 양산(陽山, 영동 양산)에 성을 쌓게 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왕건은 왕충으로 하여금 관흔을 쫒아내게 했으나, 관흔은 퇴각하여 대야성을 다시 확보하였고 대목군의 벼를 베었으며 죽령 인근의 오어곡에 군사를 주둔시켜 죽령을 봉쇄하였다. 이에 왕건은 왕충 등에게 명해 조물성 일대 정찰을 명한다. 10월에는 무곡성(군위 악계)를 함락시켰다[7]. 11월에는 견훤이 정병으로 부곡성(군위군 의흥)을 공격, 함락하고 고려 병졸 1천명을 죽였다[8]. 같은 시기에 장군 양지와 명식 등 6인이 항복해왔다. 경상도 일대에서도 왕건이 함부로 진격할 수 없게끔 한 견훤은 경상도 일대의 친 고려 호족들을 토벌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서부에서도 고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서부전선에서 견훤은 김훤, 애식, 한장 등에게 청주를 침공하게끔 하였으나 유금필에게 패퇴당했다[9]. 이 예에서도 서부전선은 매우 뚜렷하게 백제와 고려의 세력이 대치하고 있었던 지점이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하지만 유금필열전에 따르면 이 해에 나주를 백제가 다시 찾은 것으로 보인다[10]. 동부전선에선, 929년 7월에 견훤이 친히 5천의 병력으로 의성부를 침공, 성주 홍술을 죽였다. 10월엔 가은현(문경시 가은)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12월에는 대군으로 고창군(안동)을 포위하였다. 그해 9월에 영주를 방문하는 등 경상도 일대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왕건도 고창을 구원하기 위해 대군으로 출정하였다.

930년 정월에 왕건은 병산에, 견훤은 석산에 주둔하여 대치하였다. 대회전이 있었고, 이 회전에서 견훤은 대패하여 전사자만 8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유금필이 저수봉으로부터 내려와 분투하여 고려군이 대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튿날 잔병으로 견훤은 순주성(안동 풍산)[11]을 공격하였고, 장군 원봉이 도주하자 백성을 거두어 완산주로 퇴각하였다. 이 패배로 견훤은 경상도 일대에서의 패권을 급속히 상실하게 된다.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930년에 대거 고려로 돌아서게 되며, 신라 또한 931년에 왕건을 서라벌로 초대하였다. 이후 견훤은 다시는 경상도 전역에 대해서 결코 패권을 확보하지 못한다. 심지어 경주 주둔 당시에는 약탈을 일삼게 했던 견훤의 강경한 조치는 견훤의 즉위시 드러내었던 백제의 원수를 갚겠다던 명분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볼 수도 있었고, 실제로도 신라와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에게 수많은 군사적 토벌이 감행되었으므로 견훤은 명분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경상도의 호족들과 신라에 크게 거부감을 가지게 만든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여기에 서부전선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매곡성(청원)의 성주이자 견훤의 심복이었던 공직이 932년 고려에 투항하였다. 이에 따라 서부전선에서도 백제는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저력은 남아 있어서, 9월에는 일길찬 상귀를 시켜 수군으로 고려의 염주, 백주, 정주의 수군을 궤멸시키고 저산도 목장의 말 3백필을 약탈하게 하였다. 10월엔 해군장군 상애를 시켜 대우도(평북 용천)를 침략하였고, 대광 만세를 패퇴시켰다. 백제 수군은 당시 곡도로 귀양와있던 유금필에게 몇몇 지점에서 저지당했던 것 같다. 다시금 위세를 얻은 백제군은 933년엔 신검을 통군으로 하여 신라를 위협하였는데, 이 군대는 신라에 위협을 가하기는 커녕 유금필에게 돌파당하여 소수의 유금필군에게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12].

견훤이 주도한 최후의 전투는 934년 9월 운주(홍성)전투다. 왕건이 운주로 진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견훤은 갑사 5천명으로 운주로 진군하여 왕건에게 화의를 신청하였다. 위세를 보여 백제가 힘을 회복할 시간을 벌고자 하는 계책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유금필은 “오늘의 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으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염려마시고 저희들이 적을 격파하는 것이나 보십시오!”라며 아직 대오가 정돈되지 않은 견훤군에게 용맹한 기병 수천으로 돌격[13], 술사 종훈, 의사 훈겸, 용장 상달과 최필을 사로잡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전장 부근의 웅진에 속한 30개 성들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백제의 패권은 옛 백제의 영토였던 웅주 일대에서도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후

신검의 정변

935년 3월 완산주에서는 정변이 일어난다. 주도자는 장자 신검이었다.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빼어나자 후계자로 삼아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맏아들로 군무에 경험이 많던 신검, 그리고 변방에서 도독직을 역임하여 역시 군무에 경험이 많던 것으로 보이던 양검·용검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 때 차자와 삼자[14]인 양검과 용검은 각각 강주 도독과 무주 도독으로서 군을 이끌고 있었고 신검만이 완산주에 있었는데, 이찬 능환이 양검 및 용검과 음모를 꾸며 군을 움직였고, 이어 파진찬 신덕 및 영순과 더불어 능환은 신검에게 견훤을 김제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살해할 것을 권하였다. 그대로 시행되어 이 때 금강은 형들의 손에 의해 살해되고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었다. 신검이 왕위를 계승하였고, 다음과 같은 조서를 국내에 반포하였다.

"如意(여의)[유방의 척 부인 소생 아들]가 특별히 寵愛(총애)를 받았지만 惠帝(혜제)가 임금이 되었고, 建成(건성)이 외람되게 太子(태자)의 자리에 있었지만 [당] 太宗(태종)이 일어나 즉위하였으니, 天命(천명)은 바꿀 수 없고 神器(신기:임금의 자리)는 돌아갈 데가 있는 것이다. 생각하면, 大王[대왕:甄萱(견훤)]의 神武(신무)는 絶倫[절륜:出衆(출중)]하고, 英謀[영모:영특한 謀策(모책)]는 古今(고금)에 뛰어났다. 末世(말세)에 태어나서 천하의 經綸(경륜)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三韓(삼한)을 經略(경략)하고, 백제의 옛나라를 復興(부흥)하였다. 塗炭(도탄)을 廓淸(확청)하니 백성들이 安集(안집)하고, [王(왕)의 威勢(위세)가] 風雷(풍뢰)처럼 鼓舞(고무)하니 遠近(원근)이 駿馬(준마) 달리듯 하였다. (그리하여) 功業(공업)을 거의 重興(중흥)하게 되었는데, 智慮(지려)가 문득 한번 잘못되어 어린 아들[金剛(김강)]이 사랑을 차지하고 姦臣(간신)이 권세를 弄絡(농락)하여 大君[대군:甄萱(견훤)]을 晉惠(진혜)의 昏暗(혼암)으로 인도하고, 慈父(자부)를 獻公(헌공)의 迷惑(미혹)으로 빠뜨려서 寶位(보위)를 頑童(완동:완악한 아이)에게 내려주려고 하였다. 다행한 일은 上帝(상제)가 衷心(충심)을 내리어 君子(군자)가 허물을 고치고, 나 元子(원자)를 命(명)하여 한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다. 생각하면 (내가) 震長(진장)의 재목이 아닌데 어찌 임금이 될 지혜가 있으랴. 조심스럽고 송구스러워 엷은 얼음, 깊은 못을 딛는 것 같으니, 不次(부차:순서를 넘는 것)의 特恩(특은)을 미루어 維新(유신)의 政治(정치)를 보여야 할 것이므로 境內(경내)에 大赦(대사)를 내리어, 淸泰(청태) 2년(西紀(서기) 935) 10월 17일 이른 새벽 이전에 限(한)하여 이미 발각되지 않은 일과 結正[결정:結末(결말)]되지 않은 有辟[유벽:死刑(사형)] 이하의 罪(죄)는 다 赦(사)하여 면제한다. 主務者(주무자)가 施行(시행)하라."

적어도 조서의 효력은 반란을 일으킨지 6개월 이후인 10월 17일에 발효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신검 일파가 국내를 장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견훤이 창업주로서의 권위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 이 조서에서도 또한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이 권위가 무능력해졌다는 것이 신검측의 주장이었으나, 그렇지 않다는 점이 차후의 사건들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한편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왕위 계승 문제 뿐만 아니라, 이후 견훤의 행보를 볼 때 고려와 강화를 하거나 항복을 하자는 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근왕파와 계속 전쟁을 하자는 강경파 사이의 대립이 이 정변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이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견훤의 발언에도 근거를 두고 있다. 936년 정월에 견훤이 "늙은 아비가 신라 말년에 후백제를 세운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군사가 북쪽의 고려군보다 배나 많은데도 오히려 불리하니, 이는 아마 하늘이 고려를 돕는 것 같다. 그러니 어떻게 북쪽 왕에게 귀순하여 목숨을 건지지 않겠는가?"라고 아들들에게 발언하였으나, 신검, 양검, 용검은 모두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미 935년 6월에 백제를 떠났던 견훤이 시기상 할 수 없는 발언이고, 신검의 정변 이전에 고려에 항복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역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으나, 934년 이후 견훤이 통일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 만은 확실해 보인다.

고려 망명과 신검 토벌

그런데 이 조서가 효력을 지니기 이전인 935년 6월에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나주로 도주, 고려로 망명하였다. 이에 앞서 이 해에 유금필이 나주를 다시 점령하였는데, 이것이 견훤의 도주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 것 같다. 유금필과 왕만세 등이 수군을 이끌고 견훤의 망명을 도왔다. 송악에 도착하자 왕건은 자신이 견훤보다 10여 세가 어리다고 하여 견훤을 상부(尙父)로 불렀으며, 남궁을 주었으며 직위를 백관 위에 두었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으며[15] 그보다 먼저 항복해온 신강을 그 아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견훤의 망명은 후백제를 붕괴로 이끄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어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가 내응할 뜻을 밝혀왔다. 936년 6월에는 견훤이 직접 "老臣(노신)이 殿下(전하)께 몸을 의탁한 것은 殿下(전하)의 威勢(위세)에 의지하여 逆子(역자)를 誅(주)하기 위하여서입니다. 바라건대 大王(대왕)께서는 神兵(신병)을 내어 亂賊(난적)을 殲滅(섬멸)하게 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하여 후백제 정벌을 왕건에게 요청하였고, 왕건은 왕무와 박술희로 하여금 천안부로 1만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936년 9월, 왕건은 3군을 이끌고 천안부로 나아가 군을 합쳤으며 내쳐 일리천(선산)으로 나아가 신검과 대치하였다. 진격까지 세 달이 걸린 것은 왕건이 특별히 전국 각지에서 대군을 징집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왕건이 동원한 군세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총 10만 7천 5백명, 《고려사》에 따르면 총 8만 6천 8백명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왕건과 함께 전군을 사열했으나 전투에 앞장섰다는 내용은 없으며, 《고려사》에는 기병 1만을 친히 견훤이 이끌었다고 되어 있다. 고려의 군세가 엄정한 것을 본 백제의 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이 병기를 던지고 진 앞(《삼국사기》)또는 견훤 앞(《고려사》)에 항복하였고, 이로인해 백제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던 것 같다. 왕건은 장군 공훤에게 명해 백제 장수들이 원수 신검이 있다고 말한 중군으로 전 군을 돌격하게 하였다. 한 차례 싸움에 백제군은 크게 패하였고, "적장 흔강(昕康), 견달(見達), 은술(殷述), 금식(今式), 우봉(又奉) 등을 비롯하여 3천 2백 명을 사로잡고 5천 7백 명의 목을 베었(《고려사》)"으며 군기가 문란해진 "적들은 창끝을 돌려 저희들끼리 서로 공격하였다(《고려사》)." 백제군은 황산으로 퇴각하였으나 고려군은 재빠르게 기동하여 탄현을 너머 마성에 주둔하였다고 한다. 이에 신검은 청주(강주)도독 양검, 무주도독 용검 및 문무신료를 대동하고 항복하였다. 왕건은 반란을 주모한 능환을 참수하였고, 포로가 된 병졸들은 모두 풀어주었으며 항복해온 문무신료들은 능환을 제외하고는 위로하고 송악으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양검/용검은 진주로 귀양보냈다가 조금 뒤에 죽였으며 신검에게는 권유에 의해 왕위를 찬탈하였고 또한 항복해 왔기 때문에 벼슬을 제수했다고 한다(삼형제를 모두 죽였다는 설도 있다). 백제를 멸망시킨 후 견훤은 우울함에 휩싸여 등창이 매우 심하게 되어 며칠만에 황산(논산)의 한 절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 날짜가 남아있는 유일한 기록은 《삼국유사》로 936년 9월 9일이라고 하는데, 대 전투가 벌어지고 사후처리까지 마무리 되기에는 9일은 좀 짧은 기간이므로 완전히 신뢰할만한 기록은 아니다.


무덤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산 18번지에 있다.

평가

  • 김부식은 견훤열전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여기서 그는 궁예와 견훤을 과도기적 인물 가운데서도 정통성이 부족한 인물로 다루었으며, 특히 신라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보여줬다는 점을 그들에 대한 공격 근거로 삼았다.

"[史臣(사신)은] 論(논)한다. 신라는 운수가 궁하고 道(도)가 喪(상)하니,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은 歸依(귀의)할 곳이 없었다. 이에 여러 도적이 틈을 타서 고슴도치털과 같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도 심한 자가 弓裔(궁예)·甄萱(견훤) 두 사람이었다. 弓裔(궁예)는 본시 신라의 王子(왕자)로서 도리어 宗國(종국)을 원수로 삼아 멸망시킬 것을 도모하여, 先祖(선조)의 畫像(화상)을 (칼로) 치기까지 하였으니, 그 不仁(불인)함이 심하다. 萱(훤)은 신라 백성으로 일어나서 신라의 祿(녹)을 먹고 살았는데, 속으로 禍心(화심)을 품고 나라가 위태로움을 다행으로 여기어 都邑(도읍)을 침략하고 君臣(군신)을 殺戮(살륙)하기를 금수 죽이듯, 풀 베듯 하였으니, 실로 天下(천하)의 元惡(원악)이요 大罪(대죄)이다. 그러므로 弓裔(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을 당하고 甄萱(견훤)은 禍(화)가 그 아들에게서 일어났으니, 모두 自取(자취)한 것이다. 또 누구를 허물하리요. 비록 項羽(항우)와 李密(이밀)의 雄才(웅재)로도 漢(한)과 唐(당)의 興起(흥기)를 敵對(적대)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弓裔(궁예)·甄萱(견훤)의 凶惡(흉악)한 人間(인간)이 어찌 我太祖(아태조)에게 서로 抗拒(항거)할 수 있으랴? 다만 太祖(태조)를 위하여 백성을 몰아다 준 자(歐民者(구민자))이었다.}}

가족관계

아버지는 아자개이며, 《삼국유사》에 인용된 《이제가기》(李啼家記)에 따르면 장남은 견훤, 차남은 능애(能哀), 삼남은 용개(龍盖), 사남은 보개(寶盖), 오남은 소개(小盖)이며 딸로 대주도금(大主刀金)을 두었다고 한다. 부인은 상원·남원부인의 두 명이며 누가 누구 소생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삼남부터 이름 끝자가 개盖라는 점 때문에, 삼남부터 오남까지는 남원부인의 소생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능애부터 소개까지는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백제의 장군이라는 의미인지 고려의 장군이라는 의미인지도 불명확하다.

《삼국사기》에는 명확한 가족관계가 드러나있지 않고 10여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전하며, 그 가운데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은 935년의 내란에 관련된 신검(神劍), 양검(良劍), 용검(龍劍), 금강(金剛) 그리고 924년 조물성을 공격할 때 군을 이끌었던 수미강(須彌强)뿐이다. 한편 《이제가기》에는 8남 1녀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삼국유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여러 곳에서 몇 명의 부인을 얻었다는 삼국사기의 언급이 있으며 또한 시대적 정황상 29명의 부인을 두었던 왕건처럼 혼인정책을 펼쳤을 가능성이 크지만 부인이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려져있지 않으며, 금산사 유폐 기록에서 고비의 이름이 등장할 뿐이다. 신검, 양검, 용검과 금강이 서로 배다른 형제라는 것은 이름 때문에 행하는 추정이지 다른 증거는 없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이제가기》의 8남 1녀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는 신뢰받고 있지 못하다[16].

  • 상원부인. 이는 견훤의 제1모친을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에, 제1부인을 말하는 일반적인 표현인 것 같다. 이하 9인 모두를 이 소생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제가기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 같다.
    • 신검(神劍)
    • 겸뇌(謙腦)
    • 용술(龍述)
    • 총지(總智)
    • 종우(宗祐)
    • 알려지지 않음(闕)
    • 위흥(位興)
    • 청구(靑丘)
    • 국대부인(國大夫人), 순천 호족 박영규에게 시집감. 왕건은 이들 부부를 함께 치하하였으므로, 이 칭호는 왕건에게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삼국사기》의 금산사 탈출 장면에서는 애첩 고비(故比)및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이 등장한다. 특히 비록 고비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막내아들이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말년의 견훤을 위로하기 위해 신검측이 견훤과 함께 있도록 허용한, 견훤이 귀여워하던 인물들이 금산사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비는 견훤이 말년에 총애하던 애첩이지 장성한 아들을 둘 정도로 오래 전에 결혼을 하였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석

  1. 《삼국사기》(이병도 번역, krpia[1] 수록본) 제50권 열전 제10권 견훤편. 특별한 표기가 없다면 인용문은 모두 이 곳에서 따 온 것이다.
  2. 고려사》제1권 세가 제1 태조세가 태조 9년
  3. 《삼국사기》제46 열전 제6 설총에 수록된 최승우의 간략한 전기에 나타난다.
  4. 진晉의 맹장인 조생의 채찍을 의미한다.
  5. 진陳을 정벌하는데 앞장선 수의 맹장 한금호의 도끼라는 뜻이다.
  6. 이병도에 따르면, 이는 "迷復(미복)은 周易(주역) 復卦(복괘) 上六(상륙)의 말인데, 원래 陰(음)의 柔(유)한 形象(형상)으로 復卦(복괘)의 最終爻(최종효)에 당하니, 끝내 미혹하여 회복할 수 없게 되는 形像(형상)을 말한다."
  7. 이는〈신라본기〉경순왕 2년 10월에만 보인다.
  8. 《삼국사기》의 설을 따랐다. 《고려사》의 경우 오어곡성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앞서 관흔이 확보한 곳의 지명과 동일하므로 부정확한 설명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본기〉경순왕 2년 10월의 무곡성 함락 기사로 보아 이 시기 군위 일대에서 백제 군의 군사 행동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9. 《고려사》 권92 열전 제5 유금필. 태조 11년인 929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10. 《고려사》 권92 열전 제5 유금필. 왕건은 재위 18년(935년)에 "나주(羅州) 지방 40여 군은 … 근자에는 백제에게 약탈당하므로 6년간에 바닷길도 통하지 않으니…" 라고 발언하였다
  11. 이는 삼국사기의 설이다. 고려사에서는 영주 순흥으로 이야기하며, 또한 929년 7월에 있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9월에 왕건이 영주로 오기 위해서는 바로 옆 고을인 순흥을 견훤이 점령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삼국사기의 지명 및 사건 배열 순서를 따랐다.
  12. 이 전투는《고려사》 권92 열전 제5 유금필열전에만 수록되어 있다.
  13. 고려사 유금필열전에 따른 설명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적이 진을 치기도 전에 돌격하였다고라고만 되어 있다
  14. 이는 금강이 4자이며 그 형으로 양검과 용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유추하는 것으로, 직접적인 표현은 없어서 누가 차자이고 삼자인지도 불분명하다.
  15. 경순왕에게는 경주를 식읍으로 주었다는 것으로 보아, 식읍으로 양주를 택한 것은 초기 백제가 일어났던 곳이기 때문인 것 같다.
  16. 이병도의 《삼국사기》주석에 이러한 주장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