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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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어원

평양(平壤)은 평평하고 부드러운 흙을 가진 지역을 일컫는다. 따라서 평양이라는 지명은 여러 군데 나타날 수 있다. 중국에는 평양, 평성과 같은 지명이 여러 군데 보인다. 따라서 재야사학계에서는 고구려의 '평양'이 한 곳이 아니라, 상평양·하평양 등으로 나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고구려의 평양

고구려시대 평양은 고구려 남부지역의 중심도시였다. 371년에는 백제군에 고국원왕이 전사하기도 하였다. 427년,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의 수도가 되었다. 이 무렵 도성은 대성산성이었으며, 586년까지 사용하였다. 이후 대성산성 남서쪽에 장안성을 지어 고구려 멸망시까지 수도로 삼았다. 이곳에서 고구려수나라당나라의 침공을 막아내었다.

고려시대 서경

고구려 멸망 이후 평양은 발해의 영토로 포함되었다. 발해의 국력이 약화되고, 궁예후고구려가 북진하면서 후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왕건고려를 세우면서 '북진정책'을 주요이념으로 삼자 평양은 북진정책의 핵심도시로서 고려의 제2도시가 된다. 그리고 도시 이름을 '서경'이라고 불렀다. 서쪽의 수도라는 뜻이다.

고려 인종시대에 묘청을 비롯한 북진자주세력은 금나라의 위협에 강경하게 대응하여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주장하였고, 고려 인종 임금은 여기에 동의하였으나 개경파 문벌귀족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이에 [묘청]]세력은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묘청의 난(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다.

이후 몽고의 침입으로 1270년 몽고고려 서북일대를 점령하면서 이곳을 '동녕부'(東寧府)라 이름을 바꾸고 몽고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때 서경도 함께 동녕부에 포함되었다. 이후 동녕부1290년 고려에 반환되면서 서경도 다시 고려에 반환되었다. 이후 홍건적의 침입을 받았다.

조선시대의 평양

조선이 건국한 이후 평양은 줄곧 서북지역의 행정·경제적 중심지로 활동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7개월 동안이나 일본군에 점령당했으며, 이후 명나라 군대가 수복하는 과정에서도 큰 피해가 있었다. 또한 청나라의 침입에도 큰 피해를 입었다. 평양은 이렇게 고려후기 이후 줄곧 외침의 중심지에 있었으며, 이로 인해서 지속적인 타격을 받았다. 조선은 남부지방의 주민을 옮겨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북방관계가 원만해지면서 평양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근·현대 평양

평양은 청일전쟁으로 다시 피해를 입었다. 이후 평양은 도청소재지로서 평양남도의 행정기능을 전담하였다. 1938년 이후 도시의 경계를 차츰 확장해 나갔따. 이후 1946년 평양은 평안남도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도시가 되었으며, 1948년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정식수도가 된 것은 1972년 헌법개정 이후다.)가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1950년 10월 26일에 평양은 유엔군의 일시 점령하였으나 연말에 다시 북한에 넘어갔다. 전쟁시기 평양은 온전한 건물이 2채 밖에 없을 정도로 미군의 폭격을 받았으며, 도시의 기능이 완전히 멈췄다. 전쟁 이후 급속한 경제건설로 인해서 평양은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계속 그 경계를 확장하였다. 현재 평양은 3,194㎢평방킬로미터, 314만의 인구를 자랑하는 대도시이다. 현재 북한에서는 '평양직할시'라고 부른다.

논란점

현재 정통사학계에서는 평양이 후기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라고 정설로 삼고 있으며, 북한 학계에서는 고조선 건국부터 계속해서 수도로 자리잡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재야사학계에서는 고조선 수도는 요동지역이나 그 서쪽지방을 비정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이전의 고대시대에 평양의 위치와 성격을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각종 시설, 유물, 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