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조약
개요
1876년(고종 13년) 조선과 일본간에 체결된 조약. 일명 병자수호조약, 조일수호조규이라고 부른다.
근대 국제법적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동시에 일본의 강압적 위협에 의하여 맺어진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조약이다.
조약 체결 과정
운양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에서는 강경론이 대두하였다. 이후 일본은 운양호 사건에 대한 조선의 사죄,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 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조선을 개국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표면상으로는 운양호사건의 평화적 해결, 통상수호조약의 체결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1876년 구로다를 전권대사로, 이노우에를 부사로 보냈다. 이들은 일진(日進)·맹춘(孟春) 등 8척의 군함으로 1876년 1월 부산에 입항, 교섭이 잘 진전되지 않으면 전투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본국에 육군병력을 요청한 뒤 강화도로 향했고, 모리야마로 하여금 예비교섭을 시켰다.
이에 조선정부에서는 매우 긴장하여 대신회의를 열고 대책을 토의한 결과 신헌을 접견대관, 윤자승을 부관으로 임명하여 대처케 하며, 강화도를 회담장소로 하고 정식회담을 개최하였다. 그리하여 3차례의 회의를 열었는데 여러 번 결렬될 뻔했다. 이견(흥선 대원군 일파와 유생들의 반대)이 많았으나 박규수·오경석 등의 주장과 이홍장의 권고에 의하여 개국을 결정하였다.
체결 배경
조선이 개국하게 된 이유는 첫째, 세계대세가 이미 개국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둘째, 일본 정부의 무력시위가 국내의 척화론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셋째, 민씨척족이 개국을 버리고 쇄국으로 돌아가면 오히려 흥선 대원군이 다시 득세할 가능성도 점쳐졌다.(이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 넷째, 결정적으로 청나라가 개국에 찬성했기 때문이다.
조약내용(조일수호조규)
1876년 2월 26일 조인을 끝마쳤다. 강화도 조약은 12조로 되어있으며 그 내용은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조선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과 동등권을 보유한다(1조).
둘째, 20개월 이내에 부산 이외의 3항을 개항하고 일본 상인의 거주·무역의 편의를 제공할 것(4조, 5조)
셋째, 일본은 조선의 연해·도서·암초 등을 자유로이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할 것(7조)
넷째, 일본은 조선이 지정한 항구에 영사를 파견하고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 상인의 범죄는 일본 관원이 심판할 것(8조, 10조)
이 조약 1조에 조선을 자주국가라고 한 것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정치적 우월성을 부정함으로써 자기들의 조선 침략을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이 3개의 항구를 개방하고 거류지를 제공한 데 대하여 일본은 하등의 의무를 부담하지 않았다. 또 일본이 조선의 연해를 자유로이 측량한다는 것은 조선의 해항 및 요새의 침략이고, 또 일방적인 영사 파견의 권리와 영사 재판권의 설정은 일본의 침략자가 조선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지라도 간섭, 처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구미 자본주의 제국으로부터 받은 불평등조약을 조선에서 그대로 재현시킨 것이다. 이 조약에 의하여 일본은 조선에 진출하게 되어 침략의 첫 단계를 실현하게 되었다. 조약의 결과 수신사 김기수가 일본으로 파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