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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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 기원전 4세기경~서기 494년까지 존속하였던 만주 중북부지역에 위치한 고대정치세력. 맥족(북쪽사람들이라는 뜻) 계열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역사

부여는 여러 측면에서 유이민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 사서에는 기원전 3세기까지 부여의 기록이 남아 있는 점을 보아, 부여는 그 이전에 북쪽 유이민이 세운 부족연합체였다. 고조선의 간접적인 영향권 아래 놓여 있다가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기원전 108년) 독자적인 길을 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로 진전되지는 못했다. 왕권은 미약했으며, 사소한 것으로 임금이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부여는 동방에 새로 등장한 한나라 세력과 깊은 유대관계를 가지고, 고구려의 성장을 견제하였다. 하지만 부여 대소왕은 무리하게 고구려를 공격하다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반격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기 22년), 동생은 갈사국이라는 망명정권을 세우는 등 차츰 고구려에 우세했던 국력이 밀려리고 있었다. 한편 왕권은 조금씩 강화되어 서기 3세기 후반에는 간위거(簡位居)-마여(麻余)-의려왕(依慮)으로 이어지는 부자 세습이 가능할 정도로 왕권은 성장했다. 부여는 서방의 유목민족과 고구려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2세기 이후부터 더욱 한나라와의 동맹을 강화한다. 이 결과 서기 120년 위구태(尉仇台)는 부여왕자로서, 136년에는 부여왕으로서 직접 한나라를 방문했고, 한나라는 그를 융숭히 대접하였다. 또한 위구태는 당시 요동의 지배자였던 공손탁(公孫度) 집안의 여인과 혼인을 하였다.

부여는 동쪽 연해주 인근읍루를 복속시켰으나, 곧 읍루고구려의 세력으로 편입된다.

부여의 분열

부여는 285년 선비족(鮮卑族) 모용씨(慕容氏)의 침입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자 국왕 의려왕(衣慮)가 자살하고 1만 여 명의 주민이 포로로 잡혀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뒤 왕족을 비롯한 중심세력이 잠깐 동안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했다. 의라왕(衣羅王) 때 서진의 지원을 받아 선비족을 물리치고 본토로 돌아왔다. 그런데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했던 부여의 세력 중 일부가 이곳에 남아 부여를 칭하게 되자, 고구려 사람들은 이를 구별하여 북옥저 방면의 부여를 동부여로, 원래의 부여를 북부여로 불렀다. 동부여는 서기 410년광개토 대왕의 공격에 항복하고, 고구려에 흡수된다.

한편 346년 전연모용황 침공으로 인해 심한 타격을 입은 북부여는 결국 고구려에 항복하여 그 왕실만을 이어갔다. 그 뒤 부여 왕실이 기존의 고구려 영토 내부로 편입되면서 494년 완전히 멸망하였다.

부여의 정치

부여에는 임금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 가(加)는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군주가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가들은 새 군주를 추대하기도 하였고, 수해나 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그 책임을 군주에게 묻기도 하였다. 이런 점으로 봐서 전반적으로 군주권이 매우 약했다고 짐작된다.

1세기경 대소왕이 중앙집권화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부여는 고대국가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만다.

부여의 경제

  • 일찍부터 농경생활을 하였으며, 철기문화를 도입하여 생산력의 발전을 꾀했다.
  • 주요 산물로서는 말, 적옥(붉은 옥), 각종 보석과 모피가 있었다. 이런 특산물로 보아서 수렵이나 목축도 농경 못지 않게 행해졌으며, 광물자원 개발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의 사회

  • 지배계층 밑에 '하호'라고 불리우는 피지배계층이 있으며, 그 아래에 노예가 존재하였다. 하호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 부여의 법으로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물건 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고,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결국 고조선8조 법금과 비슷한 종류임을 알 수 있다. 고조선과 유사한 사회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일부다처제 사회였으며, 첩을 여럿 두는 것도 허락되었다.

부여의 문화

  • 부여의 풍속에는 '영고(맞이굿)'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는데, 이것은 수렵 사회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으로 12월마다 열렸다. 이 때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기며,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천 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우제점법).
  • 부여 사람들은 흰 옷을 즐겨 입었다.
  • 부여는 상나라(은나라) 달력(은력)을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 부여에는 많은 부족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임금이나 대부족장이 죽으면 껴묻거리순장의 장례풍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