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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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왕은 금와왕의 장남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고주몽(동명성왕)을 견제해왔다. 그러나 끝내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고구려 건국 이후 대소왕은 부여의 임금이 되어 고구려 강경책을 쓴다.
기원전 6년, 대소왕은 고구려 유리왕에게 화친을 청하고, 인질교환을 요청하였다. 유리왕은 태자 도절을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부여로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자 이를 핑계삼아 5만의 군대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폭설로 후퇴하였다. 이후 여러차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구실을 찾다가, 서기 21년 고구려가 부여 남부지역을 공격하자, 전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 군에 맞섰으나 대패하고, 고구려 장군 괴유에게 죽임을 당했다.(서기 22년 2월)
대소왕대에 부여는 국력이 상당했으며, 대소왕의 리더쉽 아래 일시적으로 전병력을 왕이 동원할 정도로 왕권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대소왕이 죽고 나자, 부여는 크게 흔들리고, 사실상 북방에서의 패권을 고구려에게 넘겨주어야만 했다. 대소왕이 죽자, 그의 아우 가운데 하나는 갈사국이라는 망명정권을 세웠으며, 그의 다른 아우는 아예 부여에 희망을 잃고, 1만명의 부여인을 이끌고 고구려에 항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