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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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고구려의 많은 유민들은 영주일대로 끌려갔다. 696년 영주에서 거란족의 반란(이진충의 난)이 일어나고,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유민들은 대조영의 지휘 아래 영주를 탈출하여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당나라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한 후, 고구려 유민들을 쫓게 되었다.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들은 말갈족(당시 말갈족 수장은 걸사비우로 추정된다.)의 협력 아래 당나라 대군을 천문령에서 물리치고, 동모산에서 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나라 이름은 대진국으로 하였다. 이후 나라 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발해는 시종일관 황제급으로 격을 맞췄으며, 연호를 사용하여 문명의 중심국임을 자부하였다.

발해는 대조영과 그 뒤를 이은 무왕 대에 크게 성장하여, 고구려의 옛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다. 이에 다급해진 당나라는 발해 왕족을 망명시켜 발해를 분열시키려 하였으나, 오히려 무왕이 보낸 장문휴의 공격에 산동반도가 일시 점령되는 등 반격을 받았다. 이후 당나라신라와 연합을 통해 발해를 견제하려 하였다.

발해는 문왕 때에 나라의 기틀이 완성되고, 상경용천부로 수도를 옮기고, 관제를 확정하였다. 또한 당나라와도 적대적 관계에서 벗어나 친선관계를 맺었다. 문왕의 치세 이후 발해는 왕권 다툼으로 인해서 어지러웠으나, 10대 임금인 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한 번 크게 국력이 성장하여 최전성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당나라와 북방민족은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이후 발해는 급격하게 성장하는 거란과 대립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요동반도를 빼앗기는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다 926년 거란의 급습으로 발해는 수도 상경용천부가 함락당하고 멸망하게 된다. 발해의 갑작스런 멸망은 역사학자들에게 여러 의문을 남기고 있다. (백두산 화산 폭발설)

발해가 멸망한 이후 거란은 발해 유민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서 동단국을 세웠으나, 발해 유민들은 후발해국, 정안국을 연이어 세우면서 거란에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이후 발해를 재건국하려는 시도는 이어져, 1029년에는 흥요국, 1115년에는 대발해국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대발해국1115년에 멸망함으로서 발해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치

파일:발해 영토.jpg
발해의 영토와 행정구역

발해는 당나라3성 6부제를 모방하였으나 전혀 다르게 운영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고, 좌사성은 충부·인부·의부를 운영하며, 우사성은 지부·예부·신부를 운영하였다. 이 외에 중정대(감찰기관)와 문적원(비서실), 주자감(국립 교육기관) 등이 중앙관제로 있었다.

지방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지방을 15부로 나누어 도독을 설치하였으며, 15부 아래 62주를 세밀하게 나눴다. 주 아래에는 현을 설치하여 현승을 파견하였으며, 현 아래의 촌락은 촌장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15부 가운데 주요 지점에는 5경을 설치하여 각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중앙군은 10위를 두었으며, 지방군은 행정 조직에 따라 편성되었다.

외교

  • 초기: 당나라, 신라와 적대적 외교관계
  • 중후기: 대체적으로 당나라, 신라와 친교관계 유지
  • 기타 교역: 이 외에도 돌궐·말갈과 같은 북방민족과 넓게 교류하였으며, 일본과도 자주 교류하였다. 발해는 말갈일본을 신하국으로 두었다.

사회, 경제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주로 지배층을 형성하였으며, 피지배층은 말갈인이거나 고구려말갈인들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 때문에 발해사의 귀속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기후 조건의 한계로 발해에서 벼농사는 크게 발달하지 않았고, 보리나 수수와 같은 작물이 많이 재배되었다. 또한 수공업과 광업이 발달하여 우수한 도구를 많이 수출하였다. 특히 철, 구리 제련술은 당대 최고를 자랑하였다. 또한 발해의 도자기는 매우 우수하여 도자기의 원산지 당나라에 수출할 정도였다.

문화

발해의 문화는 화려하고 웅장한 문화를 자랑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산은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다. 발해 문화의 근간은 고구려 문화이며, 발해 고분벽화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계승한 측면이 크다. 여기에 당나라에서 들어온 불교문화가 어우러져 발해의 고유문화를 형성하였다.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