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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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68년 고구려의 멸망과 더불어 당나라는 본격적으로 고구려 지배체제를 갖추었다.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본토를 46주로 나누어 실질적인 지배를 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당나라의 의도와는 달리 요동의 많은 성들은 여전히 당나라 군사에 맞서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는 소고구려국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또한 안승금마저에서 신라의 지원아래 소국을 형성하였다. 고구려 후국이라고 하면 이 "소고구려국" 과 "금마저"를 주로 얘기한다.

보장왕고보원한반도 서북지역~요동에 이르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이용하여 고구려를 회복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이 지역의 당나라 영향력은 계속해서 줄어갔고, 이 지역은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 고구려 후국인 소고구려국(혹은 고려후국)이 형성되었다.

이후 발해가 강성해지자, 발해의 영향력 아래 귀속되었지만, 《책부원귀》나 《당회요》와 같은 사료에 8세기부터 10세기 초까지 소고구려국의 독자적인 활동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발해가 완전히 직접 지배하기보다는 간접지배지역으로 둔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발해와 일접한 관계를 맺어 발해 무왕의 등주 정벌 시에도 큰 협력을 하였다. 특히 수군은 발해가 전적으로 소고구려국에 의존하였으리라 짐작한다.

또한 중국산동 반도발해압록강구 사이에 상권이 형성되어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소고구려국의 수도인 국내성(오늘날의 신의주. 고구려국내성과는 구별됨)을 중심으로 강력한 해상세력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해상세력은 최대 중국 남서부와 동남아까지 활발하게 교역하였는데, 9세기 중엽 월주 등에서 활약한 발해계 국제상인 '이연효'가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10세기 초 요나라와의 전쟁에서 요동성이 함락되자, 자연스럽게 소고구려국은 세력이 약화되었다. 남부에서는 궁예후고구려가 북진하여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의 일부를 점령하자 소고구려국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발해의 쇠락과 더불어 급속도로 세력이 약해진 소고구려국은 결국 요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이 지역은 잠시 요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발해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929년에는 대씨(大氏)의 후발해국(後渤海國)이 건국되었고, 936년에는 열씨(烈氏)의 정안국(定安國)이 성립했다. 이 중 정안국은 한때 송나라과 연합하여 요나라를 공격할 태세까지 보이며 부흥국으로써는 최대기간인 60년간 발해의 맥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