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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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정벌

광개토 대왕은 즉위 직후부터 백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392년 7월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성(石峴城)을 비롯한 10개 성을 빼앗고, 10월에는 난공불락이라던 관미성(關彌城)을 함락시켰다. 394년 7월 빼앗긴 땅의 탈환을 위해 침공해온 백제군을 수곡성(水谷城)에서, 395년 8월에는 패수(浿水)에서 각각 격퇴하고 8,000명을 사로잡았다. 396년에 광개토왕은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 이때 고구려군은 해로로 임진강 방면에 진출하여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해서 58성 700촌락을 점령하고, 백제아신왕(阿莘王)에게 항복을 받고 많은 전리품과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아오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 백제가야 세력과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하였다. 일부 왜 세력은 황해도 인근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광개토 대왕은 400년신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5만 대군을 파견하였다. 고구려군은 남부지방 깊숙히 쳐들어가 가야지역까지 공격하고 돌아왔다. 이 공격으로 가야연맹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407년에는 다시 백제를 공격하여 7개 성을 점령하고, 백제를 완전히 굴복시켰다.

후연과의 전쟁

초기에는 후연과 휴전을 한 상태였으나, 서기 400년후연이 먼저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전쟁에 돌입하였다. 402년 광개토 대왕은 요하를 건너 대릉하 인근 평주지역을 평정하고, 숙군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고구려군은 현재 북경 인근지역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성과 인근 지역을 점령하여 요동지역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후 405년406년에 걸친 후연의 반격을 무사히 막아내었다. 후연고구려와의 전쟁의 패배로 멸망하고 만다. 후연이 멸망한 이후 등장한 북연(北燕)과는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요동지역의 공방전을 마무리지었다.

기타 전쟁

392년에는 거란을 공격하여 사로잡힌 고구려인 1만 명을 포함하여 거란부족을 복속시켰으며, 395년에는 시라무렌강 인근의 비려를 토벌하였다. 398년에는 숙신을,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하여 복속시켰다.

내치

광개토 대왕은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 등의 중앙관직을 신설하고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하여 수묘인(守墓人)제도를 재정비했다. 393년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