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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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일제강점기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정책의 변화에 따라 다음 3시기로 구분한다.

무단통치기

일제는 한반도를 강제병합한 이후 살벌한 정책을 펼쳤다. 일단 의병전쟁을 지속적으로 토벌하였으며, 소극적 애국계몽운동도 모두 강경하게 처벌하였다. 또한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독립운동세력의 근원을 뿌리뽑으려 하였다. 치안에 있어서는 현역 헌병이 직접 경찰업무를 보는 헌병경찰제를 시행하여 항상 칼과 총으로 항상 무장하여 우리민족을 감시하였다.

이 시기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굳건히 하는 시기로서 토지조사사업산림령을 통해서 한반도의 토지와 산림을 모두 일제의 것으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정치, 경제적으로 완전히 일제의 억압에 놓이게 되었다.

민족분열통치기

일제의 무단통치에 견디다 못한 우리민족은 1919년 3.1 운동을 통하여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렸다. 일제는 총칼로 우리민족을 억압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소위 '문화통치'라고 하여 우리민족을 점진적으로 분열시키려 하였다. 일단 치안은 헌병경찰이 아니라 일반경찰이 경찰업무를 보았다. 그러나 경찰의 병력과 행정력은 무단통치기의 3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일제는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매우 부분적으로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에는 내부적인 원칙이 있었다. 예를 들어 언론을 인정해 줄 때에도 '반일언론, 중립언론, 친일언론' 등 이렇게 3부류의 언론을 허가하여 각 언론사의 성향별로 우리민족의 성향이 분열되도록 하였다. 또한 3.1 운동 이후 성장하는 사회주의 세력에 불안을 느끼는 지주와 부호들을 포섭하여 친일세력으로 삼았으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분열되어 소외된 이들도 친일세력으로 포섭했다.(*바로가기: 친일반민족행위자)

이 시기 일제산미증식계획이라고 하여 한반도에서 쌀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일제의 식량 문제 및 침략전쟁을 위한 보급으로 삼으려 하였다. 하지만 산미증식계획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한반도에서 쌀을 가져가는 공출량만은 예정대로 지킴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었으며, 농사를 짓기 위하여 만주로 떠나기도 하였다.

한반도 병참기지화 정책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의 병참기지로 한반도를 만들려는 구상을 하였다. 이에 한반도 북부지역에 집중적으로 공업시설이 들어섰으며, 여기서 군수물자들이 생산되었다. 그리고 1929년에 닥친 세계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일제는 더욱 침략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31년만주사변을 빌미로 하여 대 중국 전쟁을 시작하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한반도는 더욱 철저한 병참기지가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한반도 내부의 정리가 필요했다. 이 시기부터 언론과 결사의 자유는 매우 강경하게 제한당하기 시작했으며, 대부분의 독립운동은 지하운동으로 가거나 해외투쟁으로 전환되었다. 일제일선동조론, 한글사용금지, 신사참배, 창씨개명 등 각종 억압정책으로 한민족의 혼을 말살하려 하였다. 그리고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으로 더욱 많은 인력과 물자가 필요해지자 총동원령을 실시하여 젊은 사람을 총알받이로 내몰고, 젊은 여자들을 위안부로 끌고 갔으며, 집집을 돌아다니며 쇠붙이를 모두 거둬들이는 등 당시 일제의 침탈행위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특히 1940년부터는 한글과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우리민족 역사상 유일하게 고유의 문화가 완전히 단절된 시기를 살아야 했다. 일부 학자들은 1940년부터 1945년 일제패망시까지 일제의 정책을 '민족말살정책'이라고 한다. 이렇듯 일제 치하에서 우리민족은 큰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으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독립운동과 항쟁으로 국제사회에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인지시켰고, 그 결과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우리는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