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인종
1109년(고려 예종 4년)에 출생했다. 어머니는 이자겸의 둘째딸이고, 3명의 황후 가운데 이자겸의 셋째딸·넷째딸을 황후로 맞았다. 어렸을 때부터 이자겸의 집에서 자랐다. 한 마디로 이자겸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왕위에 오른 셈이다.
1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인종은 이자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이자겸은 1126년 '이자겸의 난'을 일으켜, 척준경과 함께 궁궐에 불을 지르고 왕을 죽이려 하였다. 인종은 두려워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기려 하였다. 그러던 차에 이자겸과 척준경의 틈이 벌어지자, 인종은 척준경을 이용하여 이자겸을 죽이고, 이듬해에는 척준경도 탄핵하여 귀양보냈다. 1127년이 되자 인종은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게 되었다.
1128년에 묘청·정지상·백수한 등이 서경(평양) 천도를 주장하자, 개경에 정이 떨어진 인종은 이를 허락하고, 서경에 대화궁을 짓게 하였다. 인종은 자주 서경에 들러 새 궁궐공사를 감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서경세력에 맞선 개경 문벌귀족들의 반발로 결국 서경천도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인종은 문벌귀족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이에 묘청은 1135년, 반란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묘청의 난(최근에는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라고 부름)'이다. 인종은 개경 문벌귀족의 우두머리인 김부식에게 이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결국 김부식에 의하여 묘청의 난은 이듬해 진압되었다. 1145년에는 김부식에게 명하여 관찬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만들게 하였다.
인종 집권기에는 대외적으로 금나라가 매우 강력한 힘을 키워, 고려를 협박하였고, 개경 문벌귀족들의 의견에 따라 인종은 금나라에게 신하의 예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