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해 이사금
신라 역대 왕계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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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 석씨 박씨 석씨 김씨 석씨 김씨 박씨 김씨 |
즉위 이전
삼국유사 기이편 탈해왕전과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조에 따르면 석탈해는 다파군국(혹은 용성국)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 여왕은 커다란 알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석탈해이다. 다파군국의 왕은 이를 수상하게 여겨 알을 버리라고 명했고, 여왕은 노예와 보물을 실어 바다로 석탈해를 흘려 보냈다. 이 배를 발견한 가야의 김수로왕은 이 배를 맞이하려 하였으나 배가 쏜살같이 달아나 신라 아진포로 흘러갔다. 거기서 석탈해는 알에서 깨어나 신체 건장한 아이가 되었다. 석탈해는 나이가 들어 집터를 물색하다가 호공의 집을 빼앗을 계획을 꾸몄다. 그리하여 호공의 집 속에 숯가루를 묻고 계략을 꾸며 호공의 집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남해 차차웅 임금은 석탈해가 지략가임을 알고 큰 공주를 석탈해에게 시집 보냈다. 그리고 석탈해를 대보에 임명하여 군권을 맡겼다. 후에 유리 이사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 설화에서 석탈해는 전형적인 난생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만큼 석탈해는 신라 역사에서 위상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호공의 집을 빼앗는 과정에서 숯가루를 이용한 점을 볼 때, 이미 신라초기에 철기문화가 크게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석탈해가 철기문화에 기반한 세력의 힘을 업고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즉위 이후
58년 호공을 대보로 삼았으며 이듬해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했다. 64년 백제가 와산성(蛙山城)과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해오자 기병 3,000명으로 격퇴했다.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를 얻자, 시림을 계림(鷄林)으로 고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67년 박씨 부족에게 영토를 나누어주고 그들을 주주(州主)·군주(郡主)라고 칭했으며, "순정"을 이벌찬(伊伐飡)으로 삼았다. 77년 황산진(黃山津)에서 가야군과 싸웠다. 죽은 뒤 토함산 산신으로 추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