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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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권 확립

성왕은 무령왕대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책을 실시하였다. 먼저 16관등제를 재정비하고, 내관(중앙관청으로 사료) 12부, 외관 10부 등 22개 관부체제를 확립하였다. 지방조직도 개편하여 담로제를 대신하여 전국을 동서남북중 5방으로 나누고, 그 아래 군현을 두었다. 수도(중방)도 전후상중하의 5개부로 나누고, 각 부별로 5항(五巷)을 두었다.

국호도 "남부여"로 새로 칭하고, 왕족을 "부여씨"로 하는 등 부여의 전통성을 빌려 단결을 도모하였다.

대외관계

종래의 나제동맹을 강화시키고, 중국 양나라와 관계를 맺는 등 대 고구려 정벌을 위한 사전조치들을 면밀히 하였다. 또한 일본에게도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문물을 전파하는 등 주변세력을 친 백제세력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551년, 신라-백제 연합군과 가야의 지원군은 일제히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하류에 이르는 지역을 순식간에 빼앗았다. 백제는 이 가운데 한강 하류지역(현재 경기도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553년 한강 하류 일대를 잃었다.

분노한 성왕은 554년 백제-일본-가야 연합군을 대동하고 관산성에 쳐들어갔으나(관산성 전투), 김무력이 이끄는 신라군에 대패하고 성왕을 비롯한 좌평 등 고위대신을 포함하여 29,600명이 전사하는 대참패를 당했다. 이로 인해서 백제의 국력은 다시 약화되었다. 또한 왕을 비롯한 주요대신들이 함께 몰살하여 중앙집권체제도 약해져 다시 귀족들이 합의하여 백제를 이끌어 나가는 등 관산성 전투의 대패는 백제 멸망의 서곡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