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백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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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진한 사로국 이래 더딘 성장을 통해서 주변 부족세력을 힘으로 정복한 후 신라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하였다. 이에 신라 안에서 주변 부족장 출신의 귀족들이 생기고, 이들이 모여 화백회의를 구성하였다. 이 화백회의에서 주요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다. 531년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이 생기기 이전까지는 왕이나 갈문왕이 화백회의를 주재하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화백회의는 귀족들을 화합시켜 중앙집권체제를 만드는 데 일부 기여하였으나, 이후 왕권과 대립하게 된다. 그래서 647년에는 비담·염종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 반란이 김유신에게 진압당하고, 대규모 귀족숙청이 이뤄진 이후 화백회의의 기능은 급속도로 약해진다.

신라 하대에 왕권이 약해지면서 귀족들의 다툼과 연합에 의해 왕이 세워지고 폐위되자, 귀족회의인 화백회의의 중요성은 다시 커졌다. 9세기 이후 화백회의는 신라의 정치적 흐름을 결정하는 중요한 위치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