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

유교지배체제 확립

초기에는 6조 직계제를 이어받았으나 이후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하였다. 1420년집현전을 재설치하여 젊은 학자들을 길러내고, 숭유억불정책을 계속 이어받아 전국 18개소의 사찰만 인정하였다. 유교적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효행록, 삼강행실도, 주자가례 등을 편찬하여 전국에 보급하였다.

조선 체제 정비

지방 향리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시켰으며, 관리들의 등용체제와 녹봉체제를 개편하였다. 또한 언론을 활성화 하기 위하여 여러 시책들을 시행하였으며 1430년에는 17만호를 대상으로 일종의 여론조사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1435년, 일종의 법전인 속육전을 편찬하였다. 형벌제도를 보완하여 피심문자가 가혹한 형벌에서 벗어나도록 하였고, 노비를 주인이 마음대로 벌주지 못하게 하였다.

조세제도로서는 전분 6등법연분 9등법을 실시하여 조세 형평성을 고려하였으며, 조세 수취 과정에서 지주나 관리들의 수탈을 막았다. 기본세율은 1/10에서 1/20으로 낮췄다.

대외정책

여진족을 소탕하여 서북 4군동북 6진(이를 4군 6진이라고 한다.)을 설치하였으며, 이곳에 백성들을 이주해 살게 하였다. 왜구에 대해서도 강경책을 사용하여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다.(1419년) 그러나 온건책도 병행하여 1423년삼포를 개항하였다. (쓰시마 섬 정벌은 조선 태종의 권한으로 시행되었다.)

문화와 과학의 발달

세종은 수많은 연구, 학술 활동을 장려하여 많은 책들이 간행되거나 출판되었다. 〈고려사〉·〈고려사절요〉·〈자치통감훈의〉 등의 역사서, 〈사서언해〉·〈대학연의언해〉·〈효행록〉·〈삼강행실도〉·〈오례의주〉 등 유교경전과 유교윤리에 관한 서적, 〈명황계감 明皇誡鑑〉·〈치평요람 治平要覽〉 등의 중국정치서, 〈운회언역〉·〈용비어천가〉·〈동국정운〉 등 훈민정음이나 음운·언해 관계 서적, 〈팔도지리지〉·〈조선전도〉·세종실록 지리지 등의 지리서, 〈향약집성방〉·〈의방유취〉 등의 의서, 〈농사직설〉 등의 농서를 비롯하여 중국법률·중국문학·천문·병서 등 다양한 범위에서 행해졌다. 궁중음악을 정리하여 박연을 시켜 아악의 토대를 쌓게 하였다.

과학기술로서는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을 발명하였으며, 이 당시 장영실이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금속활자를 수 차례 만들어 경자자(庚子字 : 1420)·갑인자(甲寅字 : 1434)·병진자(丙辰字 : 1436) 등을 주조하였다. 게다가 중국과 이슬람의 역법을 보완하여 칠정산이라는 역서를 만들어 조선은 독자적인 역법을 가지게 되었다. 화포와 도량형도 개량하였다.

그리고 최대 업적인 한글을 창제하여(1443년), 1446년에 반포하였다. 말기에는 시력과 건강이 나빠져 정사를 못 돌보았다. 그리하여 세자(조선 문종)가 대리하여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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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4대 임금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