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역사위키
Lim1498 (토론) 사용자의 2009년 5월 17일 (일) 20:42 판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이명박 (李明博, 1941년 12월 19일 - )은 현대건설 회장을 지낸 기업인 출신 정치인으로 서울특별시 시장을 역임하였다. 2007년 8월 20일 전당대회에서 한나라당17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되었다. 2008년 2월 25일, 제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학력

경력

저서

수상

  • 1984년 국민훈장 석류장
  • 1985년 금탑산업훈장
  • 1998년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조선일보)
  • 1999년 20세기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전국경제인연합회, 매일경제)
  • 2005년 2005 세계의 인물 대상(영국 파이낸설 타임즈 그룹 fDi 매거진)

생애

어린 시절

일본 오사카 시 히라노 구(平野區) 에서 4남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고, 동지상고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중 기관지확장증으로 군대를 면제받았다.

현대건설 시절

1965년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12년만인 1977년에 사장 자리에 올랐다. 현대건설을 대기업으로 키워냈다는 평가도 있고, 내실을 다지지 못해 현대건설의 법정관리를 초래했다는 의견도 있다.

한겨레212007년 7월 26일 제670호에서 이명박 후보의 현대건설 시절을 조사하여 비판하였다.[1]

정계 입문

14대 국회의원(전국구)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재산공개 직전에 아파트를 다른 사람 명의로 소유권 이전을 하는 등 불성실하게 재산공개를 하여 비난을 받았다. 15대 총선에서 종로에 출마하여 이종찬, 노무현에게 승리함으로써 15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선거기획을 담당했던 김유찬씨가 7억원 가량의 선거비용을 누락하고 7천만원 정도의 비용만을 신고했다는 것을 폭로하였다.[2] 뒤이어 이명박 후보의 참모들이 김유찬을 해외로 도피시킨 사실까지 밝혀졌다.[3] 이명박 후보는 재판을 받는 와중에 스스로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98년 3월, 주성영 검사에게 2년 6개월을 구형받았으며, 서울고등법원에서 400만원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서울시장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던[4] 이명박 후보는 고등법원의 판결에 대해 “법적 판결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판결로 보아 도저히 승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경선에 참여하지 않았다.[5]

2002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김민석 후보를 물리치고,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당시 서울시장 선거에는 이명박 후보가 소속된 '소망교회'소속 신도들을 비롯한 대형 교회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을 복원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본인의 시장 재임시절 공사를 완공하기 위하여 복원을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비판이 있다. 복원과정에서 상류를 복원하지 않고 상수도물을 사용하게 만들었으며, 발견된 문화재들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 등 환경과 문화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부실공사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다.[6][7]또한 당초 밝혔던 유지비의 10배가 넘는 230억원이 매년 들어간다는 사실도 밝혀졌다.[8] 청계천의 개발로 인해 청계천을 기반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을 떠나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청계천 사업 과정에서 양윤재 서울시 행정부시장이 재개발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아 구속되었다.

다음으로 그는 2004년 서울시의 버스 체계를 개편하였다. 버스의 번호와 색은 좀 더 체계적으로 바뀌었고, 환승 횟수와 상관없이 거리에 따라 요금이 매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개편으로 인해 버스회사들의 적자를 메우는데 수천억에 이르는 서울시의 예산이 쓰이게 되었으며, 요금도 오르게 되었다. 새로운 교통카드 시스템이 이명박 후보의 서울시장 취임 2주년에 맞추어 급하게 도입되느라 많은 오류와 혼란을 빚었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교통카드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사업자를 사전 내정했다는 의혹이 있다.

그는 소망교회 예배에서,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치적을 늘리기 위해 국제금융센터 건립을 지나치게 서둘러 금융 그룹 AIG에게 지나친 특혜를 주었으며 그로인해 AIG가 1조원 가량의 차익을 남기게 해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9]

재직 당시 5조원이던 서울시의 부채를 2조원으로 줄였다고 했으나, 그 발언이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한나라당 경선 도중에 박근혜 후보 캠프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10]

2007년, 《타임》지는 청계천복원과 버스체계 개편등을 이유로 이명박 후보를 “환경영웅”중 한 명으로 선정하였다.[11]

대통령 후보 시절

이명박은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줄곧 선두권에 있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박빙의 승부 끝에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후보로 선출된 이후 한반도 대운하 등 각종 공약이 주요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고, 그의 도덕성이 검증대에 올랐다. 특히 BBK 사건을 중심으로 한 금융사기 사건은 그의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검찰이 무혐의 판정, 대형 언론사의 적극적 방어로 인해서 결정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다. 그리하여 2007년 12월에 치뤄진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48%가 넘는 득표를 하면서 2위 후보인 정동영 후보가 약 500만표에 가까운 표차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줄곧 '성공코드'를 내세웠으며, 이는 경기불황에 허덕이는 서민층의 표를 받았다. 또한 그의 친기업, 친재벌 정책은 보수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기독교 내에서도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이런 동력을 바탕으로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대통령 재임시절

재임 초기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과 이에 대한 논란으로 지지율이 한자리수까지 떨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 언론을 장악하고, 경찰권의 강화, 검찰 및 사정기관을 동원하였으나 지지율은 쉽고 오르지 않고 있다. 또한 2008년부터 시작된 세계적 금융위기는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이를 무릅쓰고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급진적으로 강행하려 하고 있다.

각주

  1. 믿습니까, 이명박의 ‘유능한 CEO’ 신화, 《한겨레21》, 2007년 7월 26일
  2. 선거 자금 폭로 파문/김유찬씨 일문일답·이명박 의원 일문일답, 《경향신문》, 1996년 9월 11일
  3. 이명박 의원 참모 2명 구속/선거비폭로 사건, 《조선일보》, 1996년 9월 23일.
  4. “이명박 의원 어쩌자고…”/전격 서울시장 출마선언, 《동아일보》, 1998년 2월 5일.
  5. 이명박씨 “시장경선 불참”, 《국민일보》, 1998년 4월 29일.
  6. 복원 다섯달, 청계천에 물이 '줄줄' 샌다, 《오마이뉴스》, 2006년 3월 6일.
  7. 개통된지 얼마됐다고…청계천 벽면 곳곳 균열, 《세계일보》, 2005년 12월 2일.
  8. 청계천, ‘물 값+전기료+관리비’ 등으로 혈세 ‘줄줄’, 《업코리아》, 2006년 11월 20일.
  9. 국제금융센터, AIG는 계약때부터 매각 계획, 《KBS》, 2007년 8월 21일.
  10. 박근혜 캠프 "이명박, 서울시 부채 5조 더 늘려", 《오마이뉴스》, 2007년 7월 13일.
  11. Heroes of the Environment, 《타임》, 2007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