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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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1937년 대구사범학교 졸업
- 만주국 신경군관학교(新京:지금의 長春이다.)
-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졸업
-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졸업(육군사관학교 전신)
- 1957년 육군대학 졸업
가족
이력
- 1937년 문경소학교 교사
-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 1944년~1945년 관동군 중위
- 1949년 여순사건으로 연루되어 재판을 받아 1심에서 사형, 최종심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음. 구명운동으로 1950년 한국전쟁때 석방됨.
- 육군포병학교장, 제5사단장, 제7사단장, 제1군 참모장, 제6관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제2군 부사령관 역임
- 1961년 5.16군사정변을 일으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 1961년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 1962년 3월~1963년 12월 대통령 직무대행
-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
- 1963년~1979년 민주공화당 총재
- 1963년 12월 제5대 대통령
- 1967년 7월 제6대 대통령
- 1971년 7월 제7대 대통령
- 1972년 12월 제8대 대통령
- 1978년 12월 제9대 대통령
-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서 살해됨.
박정희 정권에 대한 세간의 평가
- 역사학계: 정치적으로는 군부독재정권, 경제적으로 식민자본주의로 인해서 경제적 모순을 태동한 인물.
- 대중: 정치적으로는 군부독재정권, 경제적으로 경제성장으로 산업화에 이바지.
- 민족주의 계열: 친일반민족세력으로 규정.
정치
- 인류 역사상 최초로 2번의 전면적인 헌법개정을 통해서 3, 4공화국을 탄생시켰다. 즉, 자기가 새로 만든 나라를 없애고 또 다시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 부정부패, 독재정치, 친일파 기용, 정경유착, 지역감정 등 대한민국의 부정적 정치관행이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성향
- 전반적으로 친일, 친미적 성향
- 해방 후 1946년부터 친형 박상희의 영향으로 좌익 군인들과 친해짐.
- 1949년 여순사건 진압과정 중 좌익군인으로 몰려 체포되어 사형이 선고됨. 그러나 많은 이들의 구명운동과 군부 내 남로당 비밀세력들의 명단을 넘기는 조건으로 살아남.
경제
- 박정희 정권 당시 경제성장률은 9.67%였다. 그러나 당시 세계경제 평균 성장률이 5%에 달했기 때문에 충분히 경제적 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 미국의 대외정책은 '공산주의에 대한 장벽 쌓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따라 공산주의세력과 맞닿아 있는 나라들에 대한 대폭적인 경제원조가 있었다. 미국의 생각은 아주 단순하고 합리적이었다. '배부르면 공산주의 하지 않는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의 치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미국의 세계전략이 깔려있었다.
- 1979년 그가 죽을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는 큰 위기에 빠져 있었다. 석유파동의 영향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하였으며, 비정상적인 경제성장으로 사회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사회
- 빈부격차 심화
- 부동산 투기 문제가 본격적인 사회병리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함.
- 경제성장에 따른 노동자, 빈민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조치가 전무하여 사회적 위화감이 조성됨.
미국, 일본과의 관계
- 미국은 1950년 CIA의 전신인 OSS에서 박정희를 새로운 지도자로 내세우려 하였음.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친미적인 인물이었다고 파악한다.
- 일본과의 관계는 매우 긴밀하여 청와대에서 일본말로 의사소통을 하거나, 일본육사시절의 제복을 자주 입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특히 한일협상 중이던 1962년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11월 13일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 회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기자들에게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똥도 없으니 폭파해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고 말했던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미국 국무부 외교 문서에는 박정희도 독도 폭파 발언을 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핵심들은 일본을 자신의 정신적 모태로 인식한 듯 하다.
- 1970년대 중반이후 미국과의 관계는 대단히 나빠져서 주한미군 철수론까지 대두되었다. 이 이면에는 핵개발 문제가 있었는데 이와 관련해서 이휘소 박사를 통해서 핵무기 설계도를 얻으려 했거나 얻었다는 설이 나돌았다. 주한미군철수에 대비하여 자주국방론을 내세워 미사일 개발, 각종 무기 국산화, 핵무기 개발 등으로 인하여 미국에서는 박정희 제거론까지 나돌았다.
북한과의 관계
- 정치적 위기에 내몰리자 박정희는 북한을 이용하는데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 1973년 6.23선언이라고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으로 남북관계 해소를 통한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 때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수 차례에 걸쳐 북한의 김일성을 만났다. 마침 김일성도 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민족문제해결'이라는 명분이 필요했으므로 박정희의 제의를 수락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인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발표한 선언들이기 때문에 실효적인 남북관계의 진전은 거의 없었다.
특이기록
- 미국의 맨하탄 트랜스퍼라는 그룹은 'Wanted dead or alive'라는 노래를 통해서 세계적인 독재자들과 함께 박정희를 포함시켜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를 비꼬았다. 아래는 그 노래의 가사이다.
The rule of the tyrants decline The year, 1979 From uganda to nicaragua It's bombs and bullets all the time So they corrupt, so they vile So it's coup after coup all the while Human rights they violate They think they too damn great So in disgrace now they live in exile Gairy is a wanted man Idi amin is a wanted man Shah of iran tried so hard to survive He too was wanted dead or alive Strikes, demonstrations & wars Injustice is always the cause Politicians turn too soon from Poor people into tycoons Corruption must bring harass South african vorster resign in disgrace Muzurewa take away ian smith place The uganda devil was easily cat straddled Beaten up and chased, what a waste. Gairy is a wanted man Bokassa is a wanted man Ali bhutto try so hard to survive He too was wanted dead or alive. The shah had a short time to live Because the ayatollah don't forgive When you see church ruling state With pure vengeance and hate Situation must be explosive General somoza from nicaragua Thought it was easy with the sandanistas With the help of venezuela, panama and cuba They kick him straight to america Gairy is a wanted man 'Park chung hee was a wanted man(박정희도 수배자였다.) Achem pong tried so hard to survive He too was wanted dead or alive Gairy is a wanted man Idi amin is a wanted man Shah of iran tried so hard to survive He too was wanted dead or alive Bang...you're de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