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간결한 역사·시사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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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 출생. 후에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자랐다. 현대건설 회장을 지낸 기업인 출신 정치인으로 서울특별시 시장을 역임했다. 2007년 8월 20일 한나라당의 17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됐으며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다. 대한민국 17대 대통령(재임 2008년 2월 25일~2013년 2월 24일)을 지냈다. 물욕이 많아 돈과 관련된 의혹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 현대건설 사장 및 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중동 특수에 힘입어 많은 공사를 수주했으나, 저가 수주나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훗날 현대건설이 부도위기에 놓이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있다.
  • 서울특별시장 당시 청계천 복원으로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서울 시내에 볼거리와 문화적 공간을 마련했다는 데에서는 찬사를 받았으나, 청계천 복원이 생태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었고(도올 선생 "큰 어항에 불과") 복원 과정에서 스토리가 담긴 상가가 사라졌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교통체계 개편으로 환승시스템이 정착되는 등 발전을 이루었다. 교통체계 개편 당시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가 모델로 삼은 도시는 브라질꾸리찌바라고 한다.
  •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BBK의혹과 다스, 도곡동 땅 문제가 불거졌으나 '경제대통령'을 구호로 지리멸렬한 민주·진보진영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됐다. 당선 직후 BBK 특검 수사를 받았으나 사실상 특검이 무혐의로 그를 풀어 주었다. 대통령 취임 이후 불통과 인사 참사로 어려움을 겪다 광우병 촛불집회로 벼랑 끝까지 몰렸다 겨우 회생했다. 또한 2008년부터 불어닥친 서브프라임 모기지발 세계 금융위기로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치솟는 등 경제가 흔들렸다. 그 과정에서도 무리한 환율개입과 리먼브러더스 인수 시도 등으로 비판을 자초했으나 한편으로는 통화스와프 등을 체결해 금융위기를 비교적 완만하게 극복했다. 부동산 폭락 우려가 있자 저금리와 금융규제 완화로 부동산시장을 활성화시켰지만(10.21 부동산 대책) 이는 훗날 가계부채 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재벌중심주의, 수출 중심, 각종 개발규제를 폐지하는 부동산개발 중심 경제정책으로 일관했다.
  • 한편 낮은 지지를 만회하기 위해 방송사 언론장악을 비롯해 지난 정부에 대한 보복을 감행해 박연차 게이트를 터뜨려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을 구속했다. 급기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함으로써 역풍을 맞기도 했다.
  • 물 관리를 구호로 4대강 살리기 사업을 강행, 본 사업비 22조원, 직·간접 연계사업비 포함 근 40조 원 이상의 혈세를 퍼부었지만 되레 수질이 악화되었고, 특히 낙동강은 매년 녹조로 몸살을 앓게 됐다. 또한 4대강 주변 수변시설 등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설치했으나 대부분 방치된 상태다. 자원의 안정적인 확보를 기치로 해외자원개발에 나섰으나 대부분 실효성 없는 개발로 그치고 관련 공공기관은 막대한 부채를 떠안았다. 게다가 해외 자원개발 사업 또한 막대한 공공부채만 남긴 채 실패하고 만다. 이런 실정으로 2011년 서울시장 재보선에서 패배하고 박근혜가 나서면서 대통령으로서의 실권을 잃어갔다.

퇴임 이후

  • 퇴임 이후 박근혜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테니스장을 이용하면서 편하게 지냈다. 일설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에 놓이면 그를 단죄함으로써 위기를 넘길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촛불혁명 이후 검찰의 적폐청산 수사로 궁지에 몰린 끝에 2018년 3월 19일 검찰에 의해 구속영장이 청구됐고 3월 21일 밤늦게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주요 혐의는 뇌물수수, 횡령 등이다. (바로가기: 이명박 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