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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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당나라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작전권은 대부분 당나라에게 있었고, 신라는 정예병과 당나라군의 보급 및 각종 지원을 하고 있었다. 당나라는 본래 신라와 연합군을 결성할 때에, 백제의 영토는 신라, 고구려의 영토는 당나라가 가진다고 약속하였다.

660년 나당 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켰다. 하지만 당나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백제의 옛 땅에 5개의 도독부를 두어 당나라 행정구역에 편입시켰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당나라는 663년, 경주를 계림도호부라 칭하고 문무왕을 계림 도독으로 임명하는 일을 저질렀다. 이미 이 때 당나라는 한반도를 모두 장악하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이다.

결국 667년소정방김유신에게 피살당하고[1] , 671년 신라가 옛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서 나당 전쟁의 막은 올랐다. 신라는 옛 고구려 부흥 운동군과 백제 유민들을 지원하여 전선을 분산시켰으며, 당나라고간, 이근행 등을 파견하여 고구려 부흥 운동군과 신라를 토벌하라고 지시했다. 처음에는 신라군이 불리했으나, 점차 기세를 회복하여 674년경에는 임진강 인근에서 치열하게 대치하였다.

당나라는 674년, 유인궤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고, 당나라에 있는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봉하여 신라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675년매소성에서 당나라 군 20만과 신라군 3만이 맞붙은 매소성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군은 대패하고, 676년 이듬해 벌어진 기벌포 전투에서도 당나라군은 대패하여 신라 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신라는 북진하여 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확보하였다.

나당 전쟁으로 벌어졌던 양국의 관계는 발해의 성립 이후 다시 가까워져 735년경에는 신라가 차지한 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인정받았다.

각주

  1. 역사스페셜 44회, 미스터리 추적 소정방 피살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