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 신라시대 장군·정치가. 김춘추를 도와 신라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죽은 후 흥무대왕에 추존되었다. 생몰연대는 595년~673년 7월

김유신은 가야 왕족의 후예로서 아버지는 김서현이다. 그는 15살에 화랑이 되었고, 629년 낭비성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642년 김춘추와 정치적 결연관계를 맺었다. 당시 백제의 대공세가 시작되어 한강 유역이 위태롭게 되었고, 대야성이 빼앗기는 등 신라는 수세에 몰렸다. 김유신은 반격을 가해 644년백제의 7개성을 함락시켰다.

한편 선덕여왕에 반기를 드는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647년 일어난 비담·염종의 난이었다. 김유신은 이를 효과적으로 진압하여 신라 정계에서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리고 654년에 자신과 맹약을 맺은 김춘추를 무력으로 왕위에 올렸다. 실제 화백회의에서는 상대등알천을 추대하였으나, 김유신의 반발로 김춘추를 왕위에 올렸다.

648년에는 대야성을 되찾았으며, 655년에는 대각간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60년에는 화백회의 의장인 상대등이 되어 신라의 2인자로 올라섰다. 곧이어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나당 연합군 가운데 신라군 총사령관으로 백제로 진군하였다. 그리하여 황산벌에서 계백의 항전을 물리치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당나라의 오만한 행태로 인해서 그와 당나라 소정방 사이에 알력이 생기기도 하였다.

661년에는 당나라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김유신은 당나라 대군을 먹이기 위해서 군량미를 가지고 고구려 평양성으로 향했다. 중간에 수많은 성들을 격파하면서 평양성에 진군하여 당나라 군대에 군량을 보급하였다. 그러나 당나라군은 곧 철수하고 만다. 668년에 다시 나당 연합군고구려를 공격하자, 김유신은 도총관으로 출전하려 하였으나 문무왕의 만류로 경주에서 작전지시를 하였다.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김유신은 태대각간이 되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 소정방은 노골적인 신라 침공 의지를 엿보이자, 김유신은 문경인근 당교에서 소정방과 그 부하들을 독살하였다.[1] 나당 전쟁이 일어나자 김유신은 신라군의 자문을 하면서 후방에 있었으나, 672년 석문 전투에서 신라군이 대패하자 몸소 군대를 이끌고 나가 한강 이북의 고구려 지역을 회복하였다. 673년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835년에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다.

각주

  1. 역사스페셜 44회. 미스터리 추적, 소정방 피살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