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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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1일 (수) 02:51 판

조선 역대 왕계표
  1. 태조 (1392년~1398년)
  2. 정종 (1398년~1400년)
  3. 태종 (1400년~1418년)
  4. 세종 (1418년~1450년)
  5. 문종 (1450년~1452년)
  6. 단종 (1452년~1455년)
  7. 세조 (1455년~1468년)
  8. 예종 (1468년~1469년)
  9. 성종 (1469년~1494년)
  10. 연산군 (1494년~1506년)
  11. 중종 (1506년~1544년)
  12. 인종 (1544년~1545년)
  13. 명종 (1545년~1567년)
  14. 선조 (1567년~1608년)
  15. 광해군 (1608년~1623년)
  16. 인조 (1623년~1649년)
  17. 효종 (1649년~1659년)
  18. 현종 (1659년~1674년)
  19. 숙종 (1674년~1720년)
  20. 경종 (1720년~1724년)
  21. 영조 (1724년~1776년)
  22. 정조 (1776년~1800년)
  23. 순조 (1800년~1834년)
  24. 헌종 (1834년~1849년)
  25. 철종 (1849년~1863년)
  26. 고종 (1863년~1907년, 광무황제 1897년~1907년)
  27. 순종 (융희황제 1907년~1910년)

사림 정치의 완성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이다. 후궁 소생 서자 출신으로 첫번째 임금이다. 선조 임금은 사림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성리학적인 정치관을 자리잡으려 하였다. 이황·이이·성혼 등 대유학자들과 토론을 펼치기도 했다.

윤원형과 같은 훈구세력을 몰아내었고, 기묘사화 때 희생된 조광조 등을 복원하였다. 선조 임금 대에 이르러서 완전히 사림이 조선 조정을 장악하였다.

붕당정치의 성립

1575년 무렵, 사림동인서인으로 갈려지게 되었다. 붕당정치는 선조 임금의 왕권 강화를 위해 신하들을 의도적으로 분열시켰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1589년, 정여립 사건을 바탕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서인동인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1591년 서인들은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의 당수인 정철이 쫓겨나고 동인이 정권을 잡았다. 이후 동인임진왜란 과정에서 대일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나눠졌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고, 북인남인을 비판하고, 서인남인과 손을 잡는 형국으로 진행되다가 선조 말엽, 북인이 정권을 잡았다.

붕당정치의 전개 과정에서 사림들은 많은 피를 흘렸고, 특히 기축옥사에서는 전라도 선비 1000명이 죽는 등 사림들 간의 갈등이 극심하였다. 그래서 선조 임금이 두 세력 가운데서 정국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임진왜란·정유재란

1580년일본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불만세력의 불만을 밖으로 분출하고,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조선을 침공하였다(1592년). 그러나 1591년에 조선은 일본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김성일(동인)과 황윤길(서인)은 서로 다른 보고를 올렸다. 김성일일본의 공격이 예상되지 않는다고 했고,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보고하였다. 이후 조선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파견하고, 남해안과 영남 지역의 성을 수리하는 등 일부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임진왜란을 맞고 말았다.

1592년 4월 14일 일본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순식간에 한양을 점령당하고, 선조 임금은 의주까지 피난하였고, 심지어 명나라로 도망치려고 하였다. 이후 수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반격의 기회를 잡았고, 명나라 지원군(총사령관 이여송)이 당도하면서 일본군은 영남지역까지 패주하였다. 1593년부터 1597년까지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러다 1597년, 다시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군을 보내어 조선을 재침함으로써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일본의 공격은 실패하였고, 1598년 말이 되면서 일본군은 퇴각하였다.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조선은 백성과 생산력이 근 1/3 정도로 떨어지고, 한양을 비우자 백성들의 분노로 궁궐 및 주요 관청이 불타버려 수많은 통치자료가 소실되었다. 선조 임금은 소실된 자료를 재정리하고 토지를 개간하기 위해서 말년에 노력하였다.

후계 문제

선조 임금은 후계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후계자(세자)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것이라 걱정하였다. 결국 세자를 정하는 것은 1592년 4월,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기 직전에 모든 조정 신료들과 왕족들을 모아놓고 공개리에 세자를 추천토록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세자를 추천하지 않자, 할 수 없이 선조 본인이 '광해군이 영민하다는 데, 경들은 어떤가?'라고 묻자 모든 신하들이 일제히 수긍하였다. 이는 신하들이 눈치를 보면서 선조 임금이 말을 꺼내길 바랬던 것이다.

이후 임진왜란정유재란 시기 세자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큰 활약을 하였고, 선조 임금은 광해군이 자신의 권력을 침해할 것을 우려하였다. 광해군에 대한 선조 임금의 의심이 깊어지는 와중에 선조 임금은 고대하던 정실 왕비(인목왕후)에게서 적자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영창대군이다. 선조 임금은 마지막까지 영창대군광해군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영창대군이 어리다는 것을 인정하고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