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1884년 강력한 개혁을 원하던 개화파 일부세력이 일본군을 등에 업고 일으킨 정변, 근대적인 강력한 개혁정책을 발표하였으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만에 끝나고 말았다.
갑신정변 발발과정
개화파들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노골적인 내정간섭과 함께 온건파와 급진파로 갈라졌다. 온건파는 [[청나라]야말로 서양세력을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보호막이라고 하면서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본뜬 점진적인 개화를 주장했다. 반면 급진파는 청나라와 그에 빌붙은 민씨척족세력을 제거하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따 급속한 개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급진파는 스스로를 개화당 또는 독립당이라고 부르고 온건파를 수구당·사대당이라고 불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급진파.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이조연, 민영익 등은 온건파에 속했다.
개화파는 점차 요직에서 소외되어갔다. 재정난 타개책으로 일본에서 300만 원의 차관을 들여오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이 같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884년 봄부터 개화파는 쿠데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 청나라는 프랑스와의 전쟁 때문에 조선 주둔군의 절반을 철수시키고 있었다. 한편 일본은 청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공사 다케조에를 통해 쿠데타 지원을 약속했다. 본래 김옥균 등은 미국에 기대를 걸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한지라 일본의 접근을 선뜻 받아들였다.
1884년 고종 21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저녁 7시,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 개국 축하연회가 열렸다.
수구파의 거두 민영익을 비롯한 수구파들과 개화파, 그리고 각국의 외교사절단이 참석하였다. 밤 10시경 개화파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개화파들은 고종 임금을 찾아갔다.
갑신정변의 실패
곧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이끄는 일본군 200명이 경우궁을 호위했다. 이어 한규직, 이조연,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유재현 등 수구파 인물들을 살해했다.
다음날인 12월 5일, 개화파는 개혁 정강을 발표했다. 그 중 14개조가 전해지고 있는데, 주요내용은 청나라와의 관계 단절, 문벌과 양반제도 폐지, 지조법 개정과 재정기관 일원화, 보부상 단체인 혜상공국 폐지 등이다.
창덕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6일 오후 3시, 혁신정치를 천명하는 조서를 내렸다. 바로 그때 청나라 군대가 궁궐로 들이닥쳤다.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사태가 불리해지자 재빨리 군대를 철수하였다.
일본군의 무력에 의지했던 개화파들은 바로 무너졌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박영효의 형 박영교, 홍영식은 끝까지 왕 곁에 남았다가 청나라 군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개화파 정권은 3일천하로 끝이 났다. 그들의 혁신 정강과 왕이 내리려던 조서 또한 휴지가 되어 사라졌다.
개혁 정강 14개조
- 흥선 대원군을 즉각 환국케 하고 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할 것.
-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고 재능에 의해 인재를 등용할 것.
-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리(간사한 관리)를 근절하고 궁민(궁핍한 백성)을 구제하며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할 것.
-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를 처벌할 것.
- 각도의 환자(환곡)를 영구히 폐지할 것.
- 규장각을 폐지할 것.
- 급히 순사를 두어 도적을 방지할 것.
- 혜상공국을 혁파할 것.
- 유배·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할 것.
- 4영을 합쳐 1영으로 하고, 그 중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설치할 것.
- 모든 국가재정을 호조에서 관할케 하고 그 밖의 재무관청은 혁파할 것.
- 대신과 참찬은 매일 의정부에서 회의하여 정령을 공포, 시행할 것.
- 의정부 6조 외 일체 불필요한 관청을 혁파하고 대신과 참찬이 협의처리할 것.
사후처리
궁지에 몰린 일본은 역으로 공세적으로 나섰다. 조선에게 일본 공사관 훼손과 일본인 피해에 대한 책임을 지라며 '한성조'을 체결하였고, 이토 히로부미를 보내어 이홍장과 담판을 짓게 하였다. 그리하여 천진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중요 내용은 '조선에 무슨 일이 생기면 청나라군과 일본군은 동시에 파병하고, 동시에 철수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을 근거로 일본은 조선에 개입할 수 있는 작은 여지를 남겨두었다.
한편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 일행은 몹시 불우한 나날을 보냈다. 이미 이용가치를 잃었다고 본 일본은 이 망명객들을 냉대했다. 10년 후인 1894년, 김옥균은 청나라로 건너갔다가 미국 조계의 한 여관에서 수구파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홍종우는 김옥균이 갑신정변 때 죄없는 사람들을 살해하고, 국왕을 선동하여 나라를 혼란케 하고, 외국군대를 이끌고 궁중에 들어오고, 아시아의 국제관계에 큰 해를 끼쳤기 때문에 살해했다고 밝혔다. 다른 망명객들은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평가
갑신정변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데 있다. 개화파는 농민이나 상인층의 지지를 얻으려는 어떤 구체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또 하나, 외세에 대한 인식 부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개화파는 반청의식만 강했을 뿐 외세, 특히 일본의 침략의도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명개화=일본화라고 생각하여 일본을 모델로 삼는 데 그친 것이다.
당시 서울의 상인·빈민들은 개화파에 강한 적대감마저 품고 있었다. 자신의 생활기반을 위협해오는 일본에 밀착된 개화파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실제로 일본은 조선에 침투하는 한 방법으로 늘 '내정개혁'을 외쳤다. 민중은 개화파의 근대화정책이 일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개화파의 사상적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은 그 지향으로 보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