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에서의 부흥운동
요동에서는 안시성과 요동성, 신성 등 11개 성이 당나라 군대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였다. 이 중 특히 안시성의 양만춘과 고연무 등이 대표적이다. 670년, 고연무와 신라 장군 설오유가 이끄는 연합군이 압록강을 넘어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671년 안시성이 함락되면서 요동 지역에서의 고구려 부흥운동은 위기를 맞게 된다. 이후 백수산 전투(672년), 호로하 저항선 붕괴(673년) 등으로 인해서 요동 지역의 고구려 부흥운동은 쇠약해지게 된다. 패배한 고구려 군은 한반도로 내려와 안승과 합류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 많은 유민들이 동만주로 이주하다 훗날 발해 건국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한반도에서의 부흥운동
한반도에서는 검모잠과 안승의 부흥운동이 대표적이다. 검모잠은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하고 한성(현재의 재령)을 근거지로 삼아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신라는 당나라 군의 분산을 위하여 이들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을 지원했다. 안승은 요동지역에서의 부흥운동이 실패하자 금마저(익산)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신라 문무왕은 안승에게 보덕국왕에 봉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동원하여 나당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게 된다.
당나라의 대응
고구려 부흥의식의 계승
당나라는 요동 지역의 안정을 위하여 마지막 임금이었던 보장왕을 파견하였다(677년). 그러나 보장왕은 요동성을 근거지로 고구려 부흥운동을 이끌려 했다는 것이 발각되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이후 요동 지역에는 연남생을 보내어 안정을 꾀하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요동지역은 무주공산이 되었다. 이 지역은 역사학자들이 '소고구려국'이라고 부르게 된다.
한편 당나라에 끌려 갔던 고구려 유민들은 집단을 이루며 살았고, 상당한 기간 동안 고구려 의식이 남아 있었다. 이들 가운데 영주 지역에 끌려갔던 유민들은 대조영의 지휘 아래 탈출하여 발해를 건국했으며, 당나라 내륙에 있던 이들은 이정기의 제나라(이씨) 건국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