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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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산봉우리에서 불과 연기로 위급한 상황을 알리도록 한 제도. "봉화"

고려시대부터 약간씩 운영되었다. 체계적으로 법제화 한 것은 조선 세종 시대이다. 봉화의 숫자에 따라 무사시에는 1개의 홰를 올리고 해안지방의 경우 왜적이 해상에 나타나면 2개의 홰, 해안에 가까이 오면 3개의 홰, 우리 병선과 접전시에는 4개의 홰, 왜적이 상륙할 때는 5개의 홰를 올렸고, 육지의 경우는 적이 국경 밖에 나타나면 2개의 홰, 변경에 가까이 오면 3개의 홰, 국경을 침범하면 4개의 홰, 우리 군사와 접전하면 5개의 홰를 올리도록 했다.

봉수를 관리하는 병사는 신분이 낮거나 죄를 지은 병사를 많이 썼다. 또한 봉수의 관리 상태에 따라 수령의 인사 평점에 반영하여 봉수를 잘 관리하도록 하였다. 안개·구름·비바람으로 인하여 봉수가 전달되지 않을 경우에는 화포(火咆)나 소리 또는 깃발 로써 알리거나 봉수군이 직접 달려가 알리도록 했다. 봉수의 최종 기착점은 서울 목멱산이다. 전국에 약 673개의 봉수가 있었으며, 5개의 라인이 서울까지 이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