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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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과 당나라 시절

최치원은 아주 어릴 적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최치원은 진골이 아니라 6두품이었다. 어린 최치원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벼슬은 6급인 ‘아찬’에 불과하며, 진골 귀족들의 멸시와 차별 아래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최치원은 신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의 나이 겨우 12살이었다. 어린 최치원은 외로이 당나라로 떠났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열심히 글을 쓰고, 공부했다. 그리고 당나라의 빈공과에 합격했다. 빈공과란 과거시험 가운데 당나라에 있는 외국인들끼리 겨루는 과거시험이었다. 겨우 18살에 과거시험에 합격한 최치원은 강소성 ‘율수’라는 곳에서 관리가 된다. 그곳에는 관리로서 최치원은 그곳을 훌륭히 다스린다. 그곳에서는 최치원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쌍녀분이다. 쌍녀분은 강제결혼을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씨 자매의 묘였다. 이들을 위해 최치원이 위로의 시를 바치자 감동한 두 소녀의 혼령이 그날 밤 최치원을 찾아가 만났다고 한다. (→쌍녀분 설화)

최치원은 글을 잘 쓰기로 유명했다. 그의 시를 보고 나서 유명한 중국 문인(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은 “12세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켰네. 18살에 문단을 휩쓸어 단번에 최고가 되었다.”라는 내용의 시를 남겼다. 최치원이 중국에서 남긴 1만 편의 시들은 지금도 중국 사람들이 감탄하고 있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는 동안 당나라에서는 ‘황소의 난’이라는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당나라도 백성들의 삶이 많이 힘들었다. 당나라에서는 이 반란을 막지 못해서 쩔쩔매었다. 그러다 ‘고변’이라는 장군을 불러들여 반란을 막으려 하였다. 최치원은 이 고변이라는 장군 아래에서 이런저런 일을 보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고변이라는 장군은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 사람이라는 것이다.

최치원은 고변 장군의 일을 도와주면서 역사에 길이 남을 글을 한 편 쓰게 된다. 그 제목은 ‘격황소서’이다. 반란군 대장인 ‘황소’라는 사람을 토벌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나중에 반란군 대장인 황소가 최치원이 쓴 글을 보았는데, 얼마나 놀랬는지 의자에서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글 하나로 반란군 대장을 놀라게 할 정도로 최치원은 뛰어난 사람이었다.

최치원은 그 공을 인정받아 25살의 나이에 당나라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받는다. 자금어대는 금으로 칠해진 황제가 내린 허리띠다. 이는 대단히 명예스러운 일이다. 황제가 최치원을 인정하고, 아주 높은 자리를 줄 것이라는 상징이었다.

그 동안에 최치원은 매우 많은 글을 썼다. 그 글들은 당나라 사람들도 감탄할 정도로 뛰어난 글들이었다. 훗날 당나라가 망하고 당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신당서’라는 역사책이 만들어진다. 그 책에 유일하게 외국인이 쓴 글이 언급되어 있는데, 바로 최치원의 글이다.

최치원은 시를 쓰고 글만 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각종 자료들을 정리하고, 남겼는데 너무나 완벽하게 정리한 것이 많아서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중국 도처에 남아있다. 이렇듯 최치원은 중국에서 최고의 천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쓴 수많은 글들은 계원필경이라는 책으로 정리되어 남아있다. 또한 중국에서도 수많은 그의 글들이 남아 있다. 그 글들을 통해서 우리는 최치원이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얼마나 뛰어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사실이 좌절한 최치원에게 다소나마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최치원은 항상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가 떠나온 조국이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있으면서 신라가 휘청거리는 것을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최치원은 신라가 무너지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 없었다.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

최치원은 28살에 신라로 돌아왔다. 당나라로 떠난 지 16년 만이었다. 당나라에서 최고의 천재로 이름난 최치원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신라 임금은 매우 놀라워했다.

신라 임금은 좋은 자리를 줘서 최치원을 가까이 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최치원은 진골 귀족들의 눈치가 매섭다는 것을 바로 느꼈다. 왕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진골 귀족들에게는 새로운 경쟁자가 생겼다는 것이다. 물론 최치원을 좋아하는 왕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왕이 죽는다면 자신도 죽을 것이다. 최치원은 경주를 떠나서 외지를 떠돌았다.

신라 임금은 최치원에게 태수(시장)의 벼슬을 주었다. 최치원은 경주를 떠나서 자신이 관할하는 곳에서 조용히 머물렀다. 그곳에서 최치원은 신라의 문제점을 꼼꼼히 따져보았다. 그리하여 임금에게 그 문제점과 해결책을 정리해서 올렸다. 이것이 바로 ‘시무 10여조’라고 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지금 남아있지 않지만, 여러 상황으로 볼 때 짐작할 수 있었다. 우선 골품제를 없애라고 말했을 것이다. 골품이 낮은 사람은 능력이 있더라도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도 없고, 진골 귀족들이 높고 중요한 자리들은 모두 독차지 하고 있었다. 최치원은 골품제를 없애고, 과거시험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시험은 능력에 따라 관리들을 선발하는 제도였다. 과거시험을 치른다면 게으른 진골 귀족들은 벼슬길에 나설 수 없을 것이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적어 놓았다. 최치원이 올린 ‘시무 10여조’가 이뤄진다면 신라는 다시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임금은 일단 최치원을 다시 경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아찬’이라는 벼슬을 내린다. 6두품으로서는 가장 높은 등급의 벼슬이었다. 최치원은 자신이 올린 ‘시무 10여조’가 이뤄지길 간절히 바랬다.

당시 신라의 임금은 진성여왕이라는 여왕이었다. 진성여왕은 최치원의 시무 10여조에 공감했지만, 이미 임금의 힘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진골 귀족들이 언제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상태에서 임금은 그저 하루하루 자리를 지킬 따름이었다.

최치원은 분노했다. 자신이 최선을 기울여 만든 시무 10여조가 이뤄지지 않자, 최치원은 벼슬을 버리고 떠돌기 시작했다. 894년, 최치원의 나이 37살이었다.

최치원은 정처없이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경치 좋은 곳에서 시를 짓고, 글을 남겼다. 전국 곳곳에 최치원이 흔적들이 남아있다. 우리가 잘 아는 부산 해운대도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해운대의 ‘해운’은 최치원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다. 해운대는 최치원이 머물던 곳이라는 뜻이다.

최치원은 전국을 떠돌면서 불교와 신선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최치원은 유학, 불교, 신선사상, 이 3가지를 통일시켜서 자신의 철학으로 삼았다.

최치원이 떠돌기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신라는 갈라졌다. 그리고 왕건이 유력한 호족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최치원은 자신의 못 다 이룬 꿈을 왕건에게 편지로 알려줬다. 왕건은 최치원의 편지를 보면서 새로운 나라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 지 생각했을 것이다.

최치원은 우리가 팔만대장경으로 잘 알고 있는 합천 해인사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다. 그리고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역사학자들도 그 이후의 생애는 밝혀내지 못했다. 몇몇 사람들은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 말은 사실이 아니겠지만, 그 만큼 최치원은 당시 사람들에게 뛰어난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최치원은 신라 사회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심혈을 기울인 시무 10여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떠돌면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신라골품제와 여러 문제들은 그만큼 높고 단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