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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李明博, [[1941년]] 12월 19일 - )은 [[현대건설]] 회장을 지낸 기업인 출신 정치인으로 [[서울특별시]] 시장을 역임하였다. [[2007년]] 8월 20일 전당대회에서 [[한나라당]]의 [[17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되었다. [[2008년]] 2월 25일, 제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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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 출생. 후에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자랐다. [[현대건설]] 회장을 지낸 기업인 출신 정치인으로 [[서울특별시]] 시장을 역임했다. [[2007년]] 8월 20일 한나라당의 17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됐으며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다. 대한민국 17대 대통령(재임 [[2008년]] 2월 25일~[[2013년]] 2월 24일)을 지냈다. 물욕이 많아 돈과 관련된 의혹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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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 사장 및 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중동 특수에 힘입어 많은 공사를 수주했으나, 저가 수주나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훗날 현대건설이 부도위기에 놓이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있다.
*[[1960년]] 동지상업고등학교(야간)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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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장 당시 [[청계천 복원]]으로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서울 시내에 볼거리와 문화적 공간을 마련했다는 데에서는 찬사를 받았으나, 청계천 복원이 생태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었고(도올 선생 "큰 어항에 불과") 복원 과정에서 스토리가 담긴 상가가 사라졌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교통체계 개편으로 환승시스템이 정착되는 등 발전을 이루었다. 교통체계 개편 당시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가 모델로 삼은 도시는 [[브라질]][[꾸리찌바]]라고 한다.
*[[1965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1999년]]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교 객원연구원 
 
*[[2004년]] [[서강대학교]] 명예경영학박사
 
*[[2005년]] 국립목포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 
 
 
==경력==
 
*[[1960년]]대 초반 학생운동을 통해 박정희 반대투쟁을 하였다. 당시 [[박정희]] 정부의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을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
 
*[[1977년]]~[[1992년]] [[현대건설]], 인천제철 등 현대계열사 10개사 사장 및 회장
 
*[[1992년]]~[[1998년]] 제14, 15대 [[국회의원]]
 
*[[1992년]]~現 [[미국]] [[아칸소]]주 명예대사([[클린턴]] 전 [[대통령]] 주지사 시절 위촉)
 
*[[1999년]]~[[2002년]] 아·태 환경 NGO 한국본부 총재 
 
*[[2000년]]~現 [[캄보디아]] 훈센 총리 경제고문
 
*[[2002년]]~[[2006년]] 제32대 [[서울특별시]]장(민선 3기) 
 
*현재 [[소망교회]] 장로
 
*[[한나라당]] [[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대한민국]] 17대 [[대통령]]
 
==저서==
 
*[[1995년]] 신화는 없다
 
*[[2002년]]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  
 
*[[2005년]]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수상==
 
*[[1984년]] 국민훈장 석류장
 
*[[1985년]] 금탑산업훈장
 
*[[1998년]]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조선일보]])  
 
*[[1999년]] 20세기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전국경제인연합회, 매일경제) 
 
*[[2005년]] 2005 세계의 인물 대상(영국 파이낸설 타임즈 그룹 fDi 매거진)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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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BBK]]의혹과 [[다스]], [[도곡동 땅]] 문제가 불거졌으나 '경제대통령'을 구호로 지리멸렬한 민주·진보진영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됐다. 당선 직후 [[BBK 특검]] 수사를 받았으나 사실상 특검이 무혐의로 그를 풀어 주었다. 대통령 취임 이후 불통과 인사 참사로 어려움을 겪다 [[광우병 촛불집회]]로 벼랑 끝까지 몰렸다 겨우 회생했다. 또한 [[2008년]]부터 불어닥친 서브프라임 모기지발 [[2008년 금융위기 | 세계 금융위기]]로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치솟는 등 경제가 흔들렸다. 그 과정에서도 무리한 환율개입과 리먼브러더스 인수 시도 등으로 비판을 자초했으나 한편으로는 통화스와프 등을 체결해 금융위기를 비교적 완만하게 극복했다. 부동산 폭락 우려가 있자 저금리와 금융규제 완화로 부동산시장을 활성화시켰지만([[10.21 부동산 대책]]) 이는 훗날 [[가계부채]] 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재벌중심주의, 수출 중심, 각종 개발규제를 폐지하는 부동산개발 중심 경제정책으로 일관했다.  
===어린 시절===
 
[[일본]] [[오사카]] 시 히라노 구(平野區) 에서 4남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고, 동지상고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중 기관지확장증으로 군대를 면제받았다.
 
  
===현대건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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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낮은 지지를 만회하기 위해 [[방송사 언론장악]]을 비롯해 지난 정부에 대한 보복을 감행해 [[박연차]] 게이트를 터뜨려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을 구속했다. 급기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함으로써 역풍을 맞기도 했다.
[[1965년]]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12년만인 [[1977년]]에 사장 자리에 올랐다. [[현대건설]]을 대기업으로 키워냈다는 평가도 있고, 내실을 다지지 못해 [[현대건설]]의 법정관리를 초래했다는 의견도 있다.  
 
  
[[한겨레21]][[2007년]] 7월 26일 제670호에서 이명박 후보의 [[현대건설]] 시절을 조사하여 비판하였다.<ref>[http://h21.hani.co.kr/section-021005000/2007/07/021005000200707260670017.html 믿습니까, 이명박의 ‘유능한 CEO’ 신화], 《[[한겨레21]]》, [[2007년]] 7월 26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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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관리를 구호로 [[4대강 사업 | 4대강 살리기 사업]]을 강행, 본 사업비 22조원, 직·간접 연계사업비 포함 근 40조 원 이상의 혈세를 퍼부었지만 되레 수질이 악화되었고, 특히 [[낙동강]]은 매년 녹조로 몸살을 앓게 됐다. 또한 4대강 주변 수변시설 등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설치했으나 대부분 방치된 상태다. 자원의 안정적인 확보를 기치로 해외자원개발에 나섰으나 대부분 실효성 없는 개발로 그치고 관련 공공기관은 막대한 부채를 떠안았다. 게다가 해외 자원개발 사업 또한 막대한 공공부채만 남긴 채 실패하고 만다. 이런 실정으로 [[2011년]] 서울시장 재보선에서 패배하고 [[박근혜]]가 나서면서 대통령으로서의 실권을 잃어갔다.
  
===정계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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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이후==
[[14대 국회]]의원(전국구)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재산공개 직전에 아파트를 다른 사람 명의로 소유권 이전을 하는 등 불성실하게 재산공개를 하여 비난을 받았다. 15대 총선에서 종로에 출마하여 [[이종찬]], [[노무현]]에게 승리함으로써 [[15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선거기획을 담당했던 [[김유찬]]씨가 7억원 가량의 선거비용을 누락하고 7천만원 정도의 비용만을 신고했다는 것을 폭로하였다.<ref>[http://www.kinds.or.kr/main/search/searchcontent.php?docid=01100101.19960911KHD0407&highlight=%C0%CC%B8%ED%B9%DA: 선거 자금 폭로 파문/김유찬씨 일문일답·이명박 의원 일문일답], 《[[경향신문]]》, 1996년 9월 11일</ref> 뒤이어 이명박 후보의 참모들이 [[김유찬]]을 해외로 도피시킨 사실까지 밝혀졌다.<ref>[http://www.kinds.or.kr/main/search/searchcontent.php?docid=01100801.19960923CSD0102&highlight=%C0%CC%B8%ED%B9%DA: 이명박 의원 참모 2명 구속/선거비폭로 사건], 《[[조선일보]]》, 1996년 9월 23일.</ref> 이명박 후보는 재판을 받는 와중에 스스로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98년]] 3월, [[주성영]] 검사에게 2년 6개월을 구형받았으며, 서울고등법원에서 400만원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서울]]시장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던<ref>[http://www.kinds.or.kr/main/search/searchcontent.php?docid=01100401.19980205DAD0406&highlight=%C0%CC%B8%ED%B9%DA:%BC%B1%B0%ED:%BC%B1%B0%C5%B9%FD: “이명박 의원 어쩌자고…”/전격 서울시장 출마선언], 《[[동아일보]]》, [[1998년]] 2월 5일.</ref> 이명박 후보는 고등법원의 판결에 대해 “법적 판결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판결로 보아 도저히 승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경선에 참여하지 않았다.<ref>[http://www.kinds.or.kr/main/search/searchcontent.php?docid=01100201.19980429KMD0204&highlight=%C0%CC%B8%ED%B9%DA: 이명박씨 “시장경선 불참”], 《[[국민일보]]》, [[1998년]] 4월 29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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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이후 박근혜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테니스장을 이용하면서 편하게 지냈다. 일설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에 놓이면 그를 단죄함으로써 위기를 넘길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촛불혁명]] 이후 검찰의 적폐청산 수사로 궁지에 몰린 끝에 [[2018년]] 3월 19일 검찰에 의해 구속영장이 청구됐고 3월 21일 밤늦게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주요 혐의는 뇌물수수, 횡령 등이다. (바로가기: [[이명박 혐의]])
  
[[2002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김민석]] 후보를 물리치고,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당시 [[서울]]시장 선거에는 이명박 후보가 소속된 '[[소망교회]]'소속 신도들을 비롯한 대형 교회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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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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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인물]]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을 복원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본인의 시장 재임시절 공사를 완공하기 위하여 복원을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비판이 있다. 복원과정에서 상류를 복원하지 않고 상수도물을 사용하게 만들었으며, 발견된 문화재들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 등 환경과 문화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부실공사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다.<ref>[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office_id=047&article_id=0000078658&section_id=103&section_id2=245&menu_id=103 복원 다섯달, 청계천에 물이 '줄줄' 샌다], 《[[오마이뉴스]]》, 2006년 3월 6일.</ref><ref>[http://news.empas.com/issue/show.tsp/cp_sg/876/20051202n00779/ 개통된지 얼마됐다고…청계천 벽면 곳곳 균열], 《[[세계일보]]》, [[2005년]] 12월 2일.</ref>또한 당초 밝혔던 유지비의 10배가 넘는 230억원이 매년 들어간다는 사실도 밝혀졌다.<ref>[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10&article_id=0000009727&section_id=101&menu_id=101 청계천, ‘물 값+전기료+관리비’ 등으로 혈세 ‘줄줄’], 《업코리아》, [[2006년]] 11월 20일.</ref> [[청계천]]의 개발로 인해 [[청계천]]을 기반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을 떠나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청계천]] 사업 과정에서 양윤재 서울시 행정부시장이 재개발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아 구속되었다.
 
 
 
다음으로 그는 [[2004년]] 서울시의 버스 체계를 개편하였다. 버스의 번호와 색은 좀 더 체계적으로 바뀌었고, 환승 횟수와 상관없이 거리에 따라 요금이 매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개편으로 인해 버스회사들의 적자를 메우는데 수천억에 이르는 [[서울]]시의 예산이 쓰이게 되었으며, 요금도 오르게 되었다. 새로운 교통카드 시스템이 이명박 후보의 서울시장 취임 2주년에 맞추어 급하게 도입되느라 많은 오류와 혼란을 빚었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교통카드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사업자를 사전 내정했다는 의혹이 있다.
 
 
 
그는 [[소망교회]] 예배에서,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치적을 늘리기 위해 국제금융센터 건립을 지나치게 서둘러 금융 그룹 [[AIG]]에게 지나친 특혜를 주었으며 그로인해 [[AIG]]가 1조원 가량의 차익을 남기게 해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ref>[http://news.kbs.co.kr/article/society/200708/20070821/1411930.html 국제금융센터, [[AIG]]는 계약때부터 매각 계획], 《[[KBS]]》, [[2007년]] 8월 21일.</ref>
 
 
 
재직 당시 5조원이던 [[서울]]시의 부채를 2조원으로 줄였다고 했으나, 그 발언이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한나라당]] 경선 도중에 [[박근혜]] 후보 캠프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ref>[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22287 박근혜 캠프 "이명박, 서울시 부채 5조 더 늘려"], 《[[오마이뉴스]]》, [[2007년]] 7월 13일.</ref>
 
 
 
[[2007년]], 《[[타임]]》지는 청계천복원과 버스체계 개편등을 이유로 이명박 후보를 “환경영웅”중 한 명으로 선정하였다.<ref>[http://www.time.com/time/specials/2007/article/0,28804,1663317_1663319_1669884,00.html Heroes of the Environment], 《[[타임]]》, [[2007년]] 10월.</ref>
 
 
 
===대통령 후보 시절===
 
*참고자료: [[이명박 후보]]시절 관련된 자료 모음.
 
이명박은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줄곧 선두권에 있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박빙의 승부 끝에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후보로 선출된 이후 한반도 대운하 등 각종 공약이 주요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고, 그의 도덕성이 검증대에 올랐다. 특히 [[BBK 사건]]을 중심으로 한 금융사기 사건은 그의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검찰이 무혐의 판정, 대형 언론사의 적극적 방어로 인해서 결정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다. 그리하여 2007년 12월에 치뤄진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48%가 넘는 득표를 하면서 2위 후보인 정동영 후보가 약 500만표에 가까운 표차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줄곧 '성공코드'를 내세웠으며, 이는 경기불황에 허덕이는 서민층의 표를 받았다. 또한 그의 친기업, 친재벌 정책은 보수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기독교 내에서도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이런 동력을 바탕으로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대통령 재임시절==
 
*이에 대해서는 [[이명박 정부]]를 참고 바랍니다.
 
재임 초기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과 이에 대한 논란으로 지지율이 한자리수까지 떨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 언론을 장악하고, 경찰권의 강화, [[검찰]] 및 사정기관을 동원하였으나 지지율은 쉽고 오르지 않고 있다. 또한 [[2008년]]부터 시작된 세계적 금융위기는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이를 무릅쓰고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급진적으로 강행하려 하고 있다.
 
==각주==
 
<references/>
 
[[분류:시사]]
 

2021년 8월 29일 (일) 11:21 기준 최신판

1941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 출생. 후에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자랐다. 현대건설 회장을 지낸 기업인 출신 정치인으로 서울특별시 시장을 역임했다. 2007년 8월 20일 한나라당의 17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됐으며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다. 대한민국 17대 대통령(재임 2008년 2월 25일~2013년 2월 24일)을 지냈다. 물욕이 많아 돈과 관련된 의혹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 현대건설 사장 및 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중동 특수에 힘입어 많은 공사를 수주했으나, 저가 수주나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훗날 현대건설이 부도위기에 놓이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있다.
  • 서울특별시장 당시 청계천 복원으로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서울 시내에 볼거리와 문화적 공간을 마련했다는 데에서는 찬사를 받았으나, 청계천 복원이 생태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었고(도올 선생 "큰 어항에 불과") 복원 과정에서 스토리가 담긴 상가가 사라졌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교통체계 개편으로 환승시스템이 정착되는 등 발전을 이루었다. 교통체계 개편 당시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가 모델로 삼은 도시는 브라질꾸리찌바라고 한다.
  •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BBK의혹과 다스, 도곡동 땅 문제가 불거졌으나 '경제대통령'을 구호로 지리멸렬한 민주·진보진영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됐다. 당선 직후 BBK 특검 수사를 받았으나 사실상 특검이 무혐의로 그를 풀어 주었다. 대통령 취임 이후 불통과 인사 참사로 어려움을 겪다 광우병 촛불집회로 벼랑 끝까지 몰렸다 겨우 회생했다. 또한 2008년부터 불어닥친 서브프라임 모기지발 세계 금융위기로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치솟는 등 경제가 흔들렸다. 그 과정에서도 무리한 환율개입과 리먼브러더스 인수 시도 등으로 비판을 자초했으나 한편으로는 통화스와프 등을 체결해 금융위기를 비교적 완만하게 극복했다. 부동산 폭락 우려가 있자 저금리와 금융규제 완화로 부동산시장을 활성화시켰지만(10.21 부동산 대책) 이는 훗날 가계부채 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재벌중심주의, 수출 중심, 각종 개발규제를 폐지하는 부동산개발 중심 경제정책으로 일관했다.
  • 한편 낮은 지지를 만회하기 위해 방송사 언론장악을 비롯해 지난 정부에 대한 보복을 감행해 박연차 게이트를 터뜨려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을 구속했다. 급기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함으로써 역풍을 맞기도 했다.
  • 물 관리를 구호로 4대강 살리기 사업을 강행, 본 사업비 22조원, 직·간접 연계사업비 포함 근 40조 원 이상의 혈세를 퍼부었지만 되레 수질이 악화되었고, 특히 낙동강은 매년 녹조로 몸살을 앓게 됐다. 또한 4대강 주변 수변시설 등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설치했으나 대부분 방치된 상태다. 자원의 안정적인 확보를 기치로 해외자원개발에 나섰으나 대부분 실효성 없는 개발로 그치고 관련 공공기관은 막대한 부채를 떠안았다. 게다가 해외 자원개발 사업 또한 막대한 공공부채만 남긴 채 실패하고 만다. 이런 실정으로 2011년 서울시장 재보선에서 패배하고 박근혜가 나서면서 대통령으로서의 실권을 잃어갔다.

퇴임 이후

  • 퇴임 이후 박근혜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테니스장을 이용하면서 편하게 지냈다. 일설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에 놓이면 그를 단죄함으로써 위기를 넘길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촛불혁명 이후 검찰의 적폐청산 수사로 궁지에 몰린 끝에 2018년 3월 19일 검찰에 의해 구속영장이 청구됐고 3월 21일 밤늦게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주요 혐의는 뇌물수수, 횡령 등이다. (바로가기: 이명박 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