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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9일 (일) 11:24 기준 최신판
- 고려 말기의 마지막 집권세력. 유교 성리학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다.
신진 사대부는 고려 후기 원나라 간섭기에 고려에 유입된 성리학을 배우면서 성장한 지식인들이다. 이후 고려에는 안향이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보급하자, 신진 사대부들의 세력은 커졌다. 신진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고려의 당시 어려운 상황(원나라 간섭, 권문세족)을 극복하려 하였다.
이들은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중하위직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이들의 경제적 기반은 주로 지방의 중소 지주였다. 이들은 중소지주였기 때문에 권문세족의 침탈에 쉽게 노출되었고, 그들의 경제력을 일정 부분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충선왕과 충목왕시기에 반원, 반권문세족을 기치로 내걸고 사림원과 같은 국책학술기관에서 개혁안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안향과 이색과 같은 사람은 출신 기반은 오히려 권문세족에 가까웠다. 그러나 성리학의 합리성에 바탕한 고려의 개혁을 요구하였고, 공민왕 시기에 신진 사대부들은 공민왕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개혁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권문세족들은 신진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했다. 그리하여 신진 사대부들 가운데 일부는 완전히 고려 왕조를 뒤엎어야 한다는 급진적 신진 사대부로 나아가게 된다.
고려 우왕 대의 꾸준히 이뤄진 신진 사대부들과 권문세족들의 다툼은 신진 사대부들과 신흥 무인 세력이 결합하면서 극적으로 반전을 이루게 된다. 바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다. 이후, 신진 사대부 가운데 급진적 신진 사대부가 정권을 잡았으며, 이들은 빠르고 강력한 개혁, 고려체제의 해체를 원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1391년에 이뤄진 과전법과 전제개혁이다.
1392년에 이르면 급진적 신진 사대부들과 온건적 신진 사대부들의 갈등이 표면화 되었다. 그러나 급진적 신진 사대부들인 정도전, 조준 등은 이방원과 함께 온건적 신진 사대부의 거두인 정몽주를 죽임으로써, 사실상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급진적 신진 사대부들은 조선 왕조를 개창하게 된다.
이후 급진적 신진 사대부들은 개국공신이 되어 조선의 건국과 안정에 큰 역할을 하였다. 1400년대 초반까지 남아 있던 권문세족 일가들을 해체하고, 조선의 통치체제를 완성했다. 반면 온건적 신진 사대부들은 고향으로 내려가 다시금 학문의 영역으로 돌아갔는데, 이들은 훗날 사림세력으로 자라는 데 기여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