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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24일 (금) 00:12 판

고려시대 여성들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조선시대와는 사뭇 다른 고려시대 여성들의 삶을 살펴보자.

처가살이는 일반적

고려시대에 남여가 결혼하면 처가살이는 일반적이었다. 남편은 보통 결혼하면 초기 몇년을 처가에서 머물다가 가족을 이끌고 시가로 돌아온다. 따라서 처가에서 아이도 낳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혹은 시가의 형편이 어려울 경우, 아예 처가에서 머무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처가살이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 이에 따라 아이들은 외가집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유명한 관리의 묘지명이나 기록문에 따르면 "나를 정성껏 길러준 외삼촌과 외할아버지의 은덕에 감사한다."라는 구절이 종종 보인다. 고려 인종 임금도 어렸을 때에는 외가집인 이자겸의 집에서 자랐다.

일부일처제 사회

고려시대는 일부일처제 사회였다. 첩실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몽고의 침략으로 남성들의 숫자가 크게 줄자, 일각에서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하자는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남성의 숫자가 적기 때문에 어떤 여성들은 남편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공론화한 사람은 '박유'라는 사람이다. 그는 상소를 올려 "지금 우리나라에는 첩실제도가 없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결혼하지 못하고, 외국사람의 첩실로 들어가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잇다. 그래서 첩실을 둘 수 있도록 하여 모든 관료가 본처 외에 첩을 1명 둘 수 있도록 제도화 한다면 여성들은 모두 결혼할 수 있으며, 나라의 인구가 번성할 것이다."라는 요지의 주장을 하였다.

이것은 개경에 살던 여성들에게는 대단히 분노스러운 일이었다. 첩실제도는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관계를 강화시키는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연등회가 열렸다. '박유'라는 신하도 임금을 모시고 연등회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한 할머니가 박유를 알아보고, "첩을 두자고 말한 박유라는 놈이 저기 있다."고 외치자 수많은 아녀자들이 몰려와서 박유를 손가락질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만큼 여성들의 저항이 만만찮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첩실을 두기 시작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조선초기에는 첩실을 두어 일부다처를 한 사대부 집안이 늘어났다.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다.

고려시대 호주는 집안의 남편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장성한 아들이 있더라도 어머니가 호주(가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족보에는 남녀를 구별해서 올리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순서대로 족보에 올렸다. 이는 자식간의 서열을 정할 때에도 남녀와 관계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정한다는 것을 말한다.

여성의 지위가 높기 때문에 족보에서 외가에 대한 내용도 많다. 고려는 친가와 외가를 구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외가친척들도 족보에 실렸으며, 외가친척들의 친척들도 당연히 족보에 실리게 되었다.

재산에 대한 평등

재산에 대해서도 고려는 평등했다. 일단 결혼을 하더라도 남편 재산과 아내 재산은 따로따로 구별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처럼 이혼할 경우 아내의 살 길이 막막할 일은 별로 없었다. 결혼해도 아내 재산은 여전히 아내의 소유였다. 그리고 상속에 있어서도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균분상속하였다. 이것은 조선시대 초기까지도 이어진다. 재산에 대한 평등은 부모를 모시는 데에서도 평등함으로 나타났다. 부모의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권리는 아들이나 딸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모두 같이 제사를 올렸다. 또한 부모가 늙으면 아들집에서 노년을 보내는 경우도 많지만, 딸과 사위의 봉양을 받으면서 노년을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듯 고려시대 여성들은 현대사회의 남녀평등에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평등한 사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