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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전쟁

11,530 바이트 추가됨, 2008년 10월 17일 (금)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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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1781년]]까지 북아메리카 [[영국]] 식민지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전쟁. `미국 독립혁명`, `미국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전쟁 이전===
[[1763년]]부터 [[영국]] 정부와 의회는 아메리카 식민지를 통제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을 시행하였다. 특히 경제적 자주권을 빼앗으려 하였다. 이에 아메리카 식민지 대표들은 모여서 `[[대륙 회의]]`를 개최하였다.([[1774년]]) 아메리카 식민지들과 영국은 타협을 볼 수 있었으나 너무 일찍 사건이 터져 버렸다. 바로 `[[렉싱턴 전투]]`이다. ([[1775년]])

2차 [[대륙 회의]]에서는 [[영국]]과의 전쟁은 합의를 하였으나, 그 목적이 `독립`이냐, `[[영국]]의 잘못된 정책을 시정하기 위한 행동`이냐를 놓고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당시 대다수의 식민지 인들은 독립이 아니라, 영국의 불합리한 처사를 시정하기 위해서 싸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이 식민지를 상대하기 위해서 용병을 고용하는 것에서 식민지인들의 분노를 샀다. 특히 [[인디언]]과 [[아프리카 흑인]]들, [[독일]] 출신 용병([[미국]]인들은 `[[헤세인]]`이라 부름)을 고용하자 식민지 인들은 분노를 했다. 그리고 [[영국]] 정부가 식민지 항구를 봉쇄하고 화해의 노력을 원천 거부하였다.

식민지 인들이 영국에 대한 분노를 키워가고 있을 때,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이 쓴 <[[상식]]>이라는 책자가 나왔다. 이를 통해 식민지 인들은 문제의 근원이 [[영국]]식 정치체제와 [[영국]]의 헌법임을 인식하고, [[영국]]에 독립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1776년]] 7월 4일, [[대륙 회의]]에서 `[[독립 선언서]]`가 채택되었다. 이 날을 기념하여 7월 4일을 [[미국]]은 독립기념일로 하고 있다.
===독립 전쟁===
본격적인 전쟁 분위기에 들어가자, [[대륙 회의]]에서는 각 지역의 민병대를 통합하여 `[[대륙군]]`을 창설하였다. 총 사령관은 [[조지 워싱턴]]이었다. 조지 워싱턴은 [[프랑스]]에서 온 [[라파예트 후작]], [[프러시아]]의 [[폰 슈토이벤 남작]]의 자문을 받아 영국에 대항할 계획을 세웠다.
====초기의 전투====
[[대륙군]](미국 독립군)은 [[1775년]] 6월, [[보스턴]]에 주둔한 [[영국]]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낸 채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영국]]은 [[보스턴]]이 [[영국]]에 대해 반감이 강한 지역이기 때문에 [[보스턴]]에서 싸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1776년]] 3월 17일에 보스턴을 떠나 `노바스코샤`의 `핼리팩스`(Halifax)로 향했다.

남부 지역에서는 [[영국]]에 충성하는 `충성파`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곧 진압되었따. 아메리카인들은 북쪽으로 [[캐나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륙군]] 장군인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와 [[리처드 몽고메리]](Richard Montgomery)장군은 [[캐나다]] [[퀘벡]] 지역을 압박하였으나, 몽고메리 장군이 전사하고, 아놀드 장군은 부상당했다.
====중부지역의 전투====
[[영국]]군은 보스턴 퇴각 이후 대규모로 정비되었다. [[1776년]] 여름 동안에 수백 척의 [[영국]] 함대와 3만 2000명의 병사가 `[[윌리엄 하우]]`(William Howe)장군의 지휘하에 [[뉴욕]]에 도착했다. [[윌리엄 하우]] 장군은 대륙 회의에 `항복하고 사면을 받거나, 몰살 당하거나`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협박했다. 당시 [[대륙군]]은 기껏해야 1만 90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해군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대륙 회의]]는 전쟁을 선택했다. [[영국]]군은 롱아일랜드를 점령하고, [[맨해튼]](Manhattan)을 점령했으며, [[델라웨어 강]]을 건너 [[펜실베니아]]까지 진출했다. [[영국]]군은 [[1776년]] 겨울을 [[델라웨어 강]] 인근 `트랜턴`(Trenton)에 있는 [[독일]]인 용병 [[헤세인]]들의 기지에서 지냈다.

[[조지 워싱턴]]도 반격을 가하여 [[1776년]] [[크리스마스]] 날 밤에 [[델라웨어 강]]을 건너 `트랜턴`을 점령했다. 그런 뒤 [[프린스턴]]으로 진격하였으나 `모리스타운` 인근 언덕으로 군대를 회군했다. 이렇게 [[1776년]]이 지나갔다.

[[윌리엄 하우]] 장군은 남북 협공을 계획했다. 자신이 이끄는 부대는 [[뉴욕]]에서 이쪽으로 공격하고, 북쪽의 [[캐나다]]에 위치한 군대가 남으로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아메리카의 중심 도시들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필라델피아]]는 [[영국]]군에게 함락되고, [[대륙 회의]]는 [[펜실베니아]]의 `요크`로 피신하였다. 10월 4일 [[대륙군]]이 `저먼타운`(Germantown)에서 [[영국]]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북쪽에서는 8월 6일과 16일에 [[뉴욕]]의 `오리스카니`와 [[버몬트]]에서 민병대와 [[대륙군]]이 승리하였다. 그리고 패퇴한 [[영국]] 부대는 `[[새러토가 전투]]`에서 포위당해 항복하였다. (10월 17일) 이는 `[[존 버고인]]`(John Burgoyne)이 이끄는 북부 [[영국]]군이 궤멸당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영국]]군을 비롯하여 [[영국]]을 지원한 [[인디언]] 계열의 `[[이로쿼이 연맹]]`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디언]]들은 이후 [[존 설리번]](John sullivan) 장군에게 잔인하게 보복당했고, 이 지역의 [[인디언]]들은 [[캐나다]]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해외원조의 확보와 [[영국]]의 패퇴====
[[미국]]인들은 [[프랑스]]가 가장 확실한 동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립 선언([[1776년]] 7월 4일) 이후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 직접 [[프랑스]]로 건너갔다. 프랭클린은 [[프랑스]] 외무상 [[베르겐]] 백작을 설득하여 [[프랑스]]의 지원을 이끌어 내었다.

[[1777년]] 12월 초에 [[새러토가 전투]]의 결과가 전해지자, [[영국]]의 `노스 경`은 평화안을 제안하였다. 아메리카인들이 전쟁을 그만두면 자치를 허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되자 [[베르겐]] 백작은 [[미국]]의 독립을 도와주는 것이 [[영국]]의 국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라 생각했다. [[1778년]] 2월 6일, [[베르겐]]은 [[미국]]을 공식적인 주권국으로 인정하고, [[미국]]의 군사원조를 확대할 것을 약속했다. 이렇게 되자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네덜란드]]가 [[영국]]에 맞서게 되었다. [[프랑스]]는 해군과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영국]]군은 상황이 불리한 것을 깨닫고, 아메리카인들 가운데 [[영국]]에 충성하는 세력의 지지를 이끌어 내려 하였다. 하지만 이는 실패로 끝났다. 오히려 아메리카인들의 적개심을 불러왔다. 또한 [[영국]] 충성파를 모으려고 남부와 서부지역으로 군대를 이동시키자, 많은 아메리카인들이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이는 [[미국]] 독립을 더욱 갈구하게 되었다.

북부의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주요한 전적은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일리노이]] 지역의 정착지를 빼앗은 것이 유일한 군사적 소득이었다. 그러나 [[대륙군]]의 [[베네딕트 아놀드]] 장군이 [[영국]]으로 돌아서는 배신 행위가 드러났다. 이후 [[영국]]은 [[1778년]] 12월 29일에 [[조지아]]의 `서배너`(Savannah)를 점령하고, [[1780년]] 5월 12일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 항구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승리일 뿐, [[영국]]군은 아메리카인들의 끊임없는 게릴라 전술에 타격을 받았다.

[[1780년]] 8월 16일, [[호레이쇼 게이츠]] 휘하의 [[대륙군]]이 전멸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대륙 회의]]는 [[호레이쇼 게이츠]]를 소환하고, [[조지 워싱턴]]을 다시 보냈다. 또한 [[너대니얼 그린]](Nathanael Greene)를 함께 보냈다. [[1780년]] 10월 7일, [[사우스캐롤나이나]]와 [[노스캐롤라이나]] 경계의 [[킹스 산]]에서 소총수들이 [[영국]]의 [[토리파]] 지원군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영국]]군은 지원군이 없는 상태에서 [[너대니얼 그린]]과 맞섰다. [[너대니얼 그린]]은 게릴라 전투를 통해 [[영국]]군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1781년]] 초반에는 [[영국]]군에게 여러 차례 타격을 입혔다. 또한 [[프랑스]]와 [[네덜란드]], [[스페인]] 연합 해군은 유럽에서 [[영국]] 해군의 발목을 잡았다. 고립된 [[영국]]군은 힘겹게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1781년]] 중엽에는 [[프랑스]] 지원군이 해군을 이끌고 [[영국]]군을 압박했으며, [[콘윌리스]] 장군은 1781년 10월 17일 항복하였다.

===미국 독립 달성===
[[콘윌리스]] 장군이 패배하자, [[영국]] 내에서 전쟁 수행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일어났다. [[영국]] 수상 `노스 경`은 물러났고, [[영국]]과 아메리카 밀사들이 프랑스에서 비공식 접촉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가 [[지브롤터]](Gibraltar)을 스페인에게 돌려주라고 [[영국]]에게 압박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마찰을 겪자 아메리카 대표들은 일단 [[영국]]과 비밀스럽게 예비 조약에 합의했다. [[1782년]] 11월 30일이다. 또한 [[벤저민 프랭클린]]은 [[베르젠]]을 회유하여 프랑스의 고집을 꺾었다.

최종적으로 [[1783년]] 9월 3일, 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은 독립을 명확하게 인정받았고, [[캐나다]] 남부~[[플로리다]] 이북, [[미시시피 강]]에 이르는 방대한 땅을 영토로 확보했다.

===아메리카 사회의 변화===
*[[영국 충성파]]: 대부분 이들이 [[미국]]을 떠났고(10만 이라고도 함), [[영국 국교회]]도 아메리카 대륙에서 힘을 잃었다. 일부는 [[캐나다]] [[퀘벡]]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흑은 노예: 흑인 노예들도 혁명적 분위기를 타고 `자유`라는 사상을 처음으로 접했으며, 미국 북부에서는 차례대로 노예제를 불법화 하였다. 하지만 남부지역은 잠시 노예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이내 백인 우월주의로 돌아섰다.
*[[인디언]]: `[[이로쿼이 연맹]]` [[인디언]]들의 일부와, `[[체로키]]` 부족은 [[미국]]의 서부팽창을 두려워하며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을 공격하였다. 물론 그 공격으로 인해서 잔혹한 보복을 당했고, 계속해서 서쪽으로 혹은 북쪽으로 밀려났다.
*여성: 여성 또한 자신의 권리와 인권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지만, 실제 큰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여성의 가치가 점점 비중을 더해갔다.
*경제: 절대적으로 의존해던 [[영국]]과의 무역이 단절되자, 중남미와 아시아에 시장을 개척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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