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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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5년~1781년까지 북아메리카 영국 식민지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전쟁. `미국 독립혁명`, `미국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전쟁 이전

1763년부터 영국 정부와 의회는 아메리카 식민지를 통제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을 시행하였다. 특히 경제적 자주권을 빼앗으려 하였다. 이에 아메리카 식민지 대표들은 모여서 `대륙 회의`를 개최하였다.(1774년) 아메리카 식민지들과 영국은 타협을 볼 수 있었으나 너무 일찍 사건이 터져 버렸다. 바로 `렉싱턴 전투`이다. (1775년)

2차 대륙 회의에서는 영국과의 전쟁은 합의를 하였으나, 그 목적이 `독립`이냐, `영국의 잘못된 정책을 시정하기 위한 행동`이냐를 놓고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당시 대다수의 식민지 인들은 독립이 아니라, 영국의 불합리한 처사를 시정하기 위해서 싸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이 식민지를 상대하기 위해서 용병을 고용하는 것에서 식민지인들의 분노를 샀다. 특히 인디언아프리카 흑인들, 독일 출신 용병(미국인들은 `헤세인`이라 부름)을 고용하자 식민지 인들은 분노를 했다. 그리고 영국 정부가 식민지 항구를 봉쇄하고 화해의 노력을 원천 거부하였다.

식민지 인들이 영국에 대한 분노를 키워가고 있을 때,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이 쓴 <상식>이라는 책자가 나왔다. 이를 통해 식민지 인들은 문제의 근원이 영국식 정치체제와 영국의 헌법임을 인식하고, 영국에 독립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1776년 7월 4일, 대륙 회의에서 `독립 선언서`가 채택되었다. 이 날을 기념하여 7월 4일을 미국은 독립기념일로 하고 있다.

독립 전쟁

본격적인 전쟁 분위기에 들어가자, 대륙 회의에서는 각 지역의 민병대를 통합하여 `대륙군`을 창설하였다. 총 사령관은 조지 워싱턴이었다. 조지 워싱턴은 프랑스에서 온 라파예트 후작, 프러시아폰 슈토이벤 남작의 자문을 받아 영국에 대항할 계획을 세웠다.

초기의 전투

대륙군(미국 독립군)은 1775년 6월, 보스턴에 주둔한 영국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낸 채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영국보스턴영국에 대해 반감이 강한 지역이기 때문에 보스턴에서 싸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1776년 3월 17일에 보스턴을 떠나 `노바스코샤`의 `핼리팩스`(Halifax)로 향했다.

남부 지역에서는 영국에 충성하는 `충성파`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곧 진압되었따. 아메리카인들은 북쪽으로 캐나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륙군 장군인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와 리처드 몽고메리(Richard Montgomery)장군은 캐나다 퀘벡 지역을 압박하였으나, 몽고메리 장군이 전사하고, 아놀드 장군은 부상당했다.

중부지역의 전투

영국군은 보스턴 퇴각 이후 대규모로 정비되었다. 1776년 여름 동안에 수백 척의 영국 함대와 3만 2000명의 병사가 `윌리엄 하우`(William Howe)장군의 지휘하에 뉴욕에 도착했다. 윌리엄 하우 장군은 대륙 회의에 `항복하고 사면을 받거나, 몰살 당하거나`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협박했다. 당시 대륙군은 기껏해야 1만 90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해군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대륙 회의는 전쟁을 선택했다. 영국군은 롱아일랜드를 점령하고, 맨해튼(Manhattan)을 점령했으며, 델라웨어 강을 건너 펜실베니아까지 진출했다. 영국군은 1776년 겨울을 델라웨어 강 인근 `트랜턴`(Trenton)에 있는 독일인 용병 헤세인들의 기지에서 지냈다.

조지 워싱턴도 반격을 가하여 1776년 크리스마스 날 밤에 델라웨어 강을 건너 `트랜턴`을 점령했다. 그런 뒤 프린스턴으로 진격하였으나 `모리스타운` 인근 언덕으로 군대를 회군했다. 이렇게 1776년이 지나갔다.

윌리엄 하우 장군은 남북 협공을 계획했다. 자신이 이끄는 부대는 뉴욕에서 이쪽으로 공격하고, 북쪽의 캐나다에 위치한 군대가 남으로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아메리카의 중심 도시들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필라델피아영국군에게 함락되고, 대륙 회의펜실베니아의 `요크`로 피신하였다. 10월 4일 대륙군이 `저먼타운`(Germantown)에서 영국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북쪽에서는 8월 6일과 16일에 뉴욕의 `오리스카니`와 버몬트에서 민병대와 대륙군이 승리하였다. 그리고 패퇴한 영국 부대는 `새러토가 전투`에서 포위당해 항복하였다. (10월 17일) 이는 `존 버고인`(John Burgoyne)이 이끄는 북부 영국군이 궤멸당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영국군을 비롯하여 영국을 지원한 인디언 계열의 `이로쿼이 연맹`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디언들은 이후 존 설리번(John sullivan) 장군에게 잔인하게 보복당했고, 이 지역의 인디언들은 캐나다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해외원조의 확보와 영국의 패퇴

미국인들은 프랑스가 가장 확실한 동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립 선언(1776년 7월 4일) 이후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 직접 프랑스로 건너갔다. 프랭클린은 프랑스 외무상 베르겐 백작을 설득하여 프랑스의 지원을 이끌어 내었다.

1777년 12월 초에 새러토가 전투의 결과가 전해지자, 영국의 `노스 경`은 평화안을 제안하였다. 아메리카인들이 전쟁을 그만두면 자치를 허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되자 베르겐 백작은 미국의 독립을 도와주는 것이 영국의 국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라 생각했다. 1778년 2월 6일, 베르겐미국을 공식적인 주권국으로 인정하고, 미국의 군사원조를 확대할 것을 약속했다. 이렇게 되자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프랑스스페인, 네덜란드영국에 맞서게 되었다. 프랑스는 해군과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영국군은 상황이 불리한 것을 깨닫고, 아메리카인들 가운데 영국에 충성하는 세력의 지지를 이끌어 내려 하였다. 하지만 이는 실패로 끝났다. 오히려 아메리카인들의 적개심을 불러왔다. 또한 영국 충성파를 모으려고 남부와 서부지역으로 군대를 이동시키자, 많은 아메리카인들이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이는 미국 독립을 더욱 갈구하게 되었다.

북부의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주요한 전적은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일리노이 지역의 정착지를 빼앗은 것이 유일한 군사적 소득이었다. 그러나 대륙군베네딕트 아놀드 장군이 영국으로 돌아서는 배신 행위가 드러났다. 이후 영국1778년 12월 29일에 조지아의 `서배너`(Savannah)를 점령하고, 1780년 5월 12일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 항구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승리일 뿐, 영국군은 아메리카인들의 끊임없는 게릴라 전술에 타격을 받았다.

1780년 8월 16일, 호레이쇼 게이츠 휘하의 대륙군이 전멸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대륙 회의호레이쇼 게이츠를 소환하고, 조지 워싱턴을 다시 보냈다. 또한 너대니얼 그린(Nathanael Greene)를 함께 보냈다. 1780년 10월 7일, 사우스캐롤나이나노스캐롤라이나 경계의 킹스 산에서 소총수들이 영국토리파 지원군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영국군은 지원군이 없는 상태에서 너대니얼 그린과 맞섰다. 너대니얼 그린은 게릴라 전투를 통해 영국군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1781년 초반에는 영국군에게 여러 차례 타격을 입혔다. 또한 프랑스네덜란드, 스페인 연합 해군은 유럽에서 영국 해군의 발목을 잡았다. 고립된 영국군은 힘겹게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1781년 중엽에는 프랑스 지원군이 해군을 이끌고 영국군을 압박했으며, 콘윌리스 장군은 1781년 10월 17일 항복하였다.

미국 독립 달성

콘윌리스 장군이 패배하자, 영국 내에서 전쟁 수행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일어났다. 영국 수상 `노스 경`은 물러났고, 영국과 아메리카 밀사들이 프랑스에서 비공식 접촉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지브롤터(Gibraltar)을 스페인에게 돌려주라고 영국에게 압박했다. 영국프랑스가 마찰을 겪자 아메리카 대표들은 일단 영국과 비밀스럽게 예비 조약에 합의했다. 1782년 11월 30일이다. 또한 벤저민 프랭클린베르젠을 회유하여 프랑스의 고집을 꺾었다.

최종적으로 1783년 9월 3일, 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은 독립을 명확하게 인정받았고, 캐나다 남부~플로리다 이북, 미시시피 강에 이르는 방대한 땅을 영토로 확보했다.

아메리카 사회의 변화

  • 영국 충성파: 대부분 이들이 미국을 떠났고(10만 이라고도 함), 영국 국교회도 아메리카 대륙에서 힘을 잃었다. 일부는 캐나다 퀘벡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 흑은 노예: 흑인 노예들도 혁명적 분위기를 타고 `자유`라는 사상을 처음으로 접했으며, 미국 북부에서는 차례대로 노예제를 불법화 하였다. 하지만 남부지역은 잠시 노예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이내 백인 우월주의로 돌아섰다.
  • 인디언: `이로쿼이 연맹` 인디언들의 일부와, `체로키` 부족은 미국의 서부팽창을 두려워하며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을 공격하였다. 물론 그 공격으로 인해서 잔혹한 보복을 당했고, 계속해서 서쪽으로 혹은 북쪽으로 밀려났다.
  • 여성: 여성 또한 자신의 권리와 인권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지만, 실제 큰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여성의 가치가 점점 비중을 더해갔다.
  • 경제: 절대적으로 의존해던 영국과의 무역이 단절되자, 중남미와 아시아에 시장을 개척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