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뀜
탈해 이사금
,{{틀:신라 역대 왕계표}}
*[[신라]]의 4대 임금. 재위(서기 [[57년]]~[[80년]]). 생몰연대(?~서기 [[80년]])
===즉위 이전===
[[삼국유사]] 기이편 탈해왕전과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조에 따르면 석탈해는 [[다파군국]](혹은 [[용성국]])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 여왕은 커다란 알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석탈해이다. [[다파군국]]의 왕은 이를 수상하게 여겨 알을 버리라고 명했고, 여왕은 노예와 보물을 실어 바다로 석탈해를 흘려 보냈다. 이 배를 발견한 [[가야]]의 [[김수로왕]]은 이 배를 맞이하려 하였으나 배가 쏜살같이 달아나 [[신라]] [[아진포]]로 흘러갔다. 거기서 석탈해는 알에서 깨어나 신체 건장한 아이가 되었다. 석탈해는 나이가 들어 집터를 물색하다가 [[호공]]의 집을 빼앗을 계획을 꾸몄다. 그리하여 [[호공]]의 집 속에 숯가루를 묻고 계략을 꾸며 [[호공]]의 집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남해 차차웅]] 임금은 석탈해가 지략가임을 알고 큰 공주를 석탈해에게 시집 보냈다. 그리고 석탈해를 [[대보]]에 임명하여 군권을 맡겼다. 후에 [[유리 이사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 설화에서 석탈해는 전형적인 [[난생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만큼 석탈해는 [[신라]] 역사에서 위상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호공]]의 집을 빼앗는 과정에서 숯가루를 이용한 점을 볼 때, 이미 [[신라]]초기에 [[철기문화]]가 크게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석탈해가 [[철기문화]]에 기반한 세력의 힘을 업고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즉위 이후===
[[58년]] [[호공]]을 [[대보]]로 삼았으며 이듬해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했다. [[64년]] [[백제]]가 [[와산성]](蛙山城)과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해오자 기병 3,000명으로 격퇴했다.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를 얻자, 시림을 [[계림]](鷄林)으로 고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67년]] 박씨 부족에게 영토를 나누어주고 그들을 주주(州主)·군주(郡主)라고 칭했으며, "순정"을 [[이벌찬]](伊伐飡)으로 삼았다. [[77년]] [[황산진]](黃山津)에서 [[가야]]군과 싸웠다. 죽은 뒤 [[토함산]] 산신으로 추앙되었다.
[[분류:신라]]
[[분류:임금]]
*[[신라]]의 4대 임금. 재위(서기 [[57년]]~[[80년]]). 생몰연대(?~서기 [[80년]])
===즉위 이전===
[[삼국유사]] 기이편 탈해왕전과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조에 따르면 석탈해는 [[다파군국]](혹은 [[용성국]])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 여왕은 커다란 알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석탈해이다. [[다파군국]]의 왕은 이를 수상하게 여겨 알을 버리라고 명했고, 여왕은 노예와 보물을 실어 바다로 석탈해를 흘려 보냈다. 이 배를 발견한 [[가야]]의 [[김수로왕]]은 이 배를 맞이하려 하였으나 배가 쏜살같이 달아나 [[신라]] [[아진포]]로 흘러갔다. 거기서 석탈해는 알에서 깨어나 신체 건장한 아이가 되었다. 석탈해는 나이가 들어 집터를 물색하다가 [[호공]]의 집을 빼앗을 계획을 꾸몄다. 그리하여 [[호공]]의 집 속에 숯가루를 묻고 계략을 꾸며 [[호공]]의 집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남해 차차웅]] 임금은 석탈해가 지략가임을 알고 큰 공주를 석탈해에게 시집 보냈다. 그리고 석탈해를 [[대보]]에 임명하여 군권을 맡겼다. 후에 [[유리 이사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 설화에서 석탈해는 전형적인 [[난생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만큼 석탈해는 [[신라]] 역사에서 위상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호공]]의 집을 빼앗는 과정에서 숯가루를 이용한 점을 볼 때, 이미 [[신라]]초기에 [[철기문화]]가 크게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석탈해가 [[철기문화]]에 기반한 세력의 힘을 업고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즉위 이후===
[[58년]] [[호공]]을 [[대보]]로 삼았으며 이듬해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했다. [[64년]] [[백제]]가 [[와산성]](蛙山城)과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해오자 기병 3,000명으로 격퇴했다.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를 얻자, 시림을 [[계림]](鷄林)으로 고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67년]] 박씨 부족에게 영토를 나누어주고 그들을 주주(州主)·군주(郡主)라고 칭했으며, "순정"을 [[이벌찬]](伊伐飡)으로 삼았다. [[77년]] [[황산진]](黃山津)에서 [[가야]]군과 싸웠다. 죽은 뒤 [[토함산]] 산신으로 추앙되었다.
[[분류:신라]]
[[분류:임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