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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중엽,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신라]]와 [[당나라]]가 결성한 연합군.
===결성배경===
[[신라]]는 [[642년]] 이후 [[백제]] 의자왕의 지속적인 공격에 나라가 흔들리고 있었다. 대 [[백제]] 주요 거점인 [[대야성]]은 점령당했고, 심지어 [[한강]] 유역의 최후 보루인 [[당항성]](당성)도 [[고구려]]-[[백제]]의 협공에 놓이는 상황이었다. 내부적으로는 귀족들의 반란인 [[비담·염종의 난]]이 일어나 나라가 어수선하였다. 이런 국난을 자체적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웠으며, 가장 심각한 [[백제]]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부의 힘을 빌려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 접근하여 [[백제]] 공격을 논의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당나라]]에 손을 벌린다.
[[당나라]] 또한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끊임없이 소모되고 있었다. [[당나라]]는 대 [[고구려]] 전쟁([[고당 전쟁]])을 마치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할 세력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당나라]]의 사정을 꿰뚫은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켜주는 대가로 [[고구려]] 공격을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군사동맹을 맺게 된다. [[신라]]는 [[당나라]]의 군사력으로 최대 관건인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으며, [[당나라]]는 [[신라]]의 지원으로 [[고구려]]를 손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영토 분배는 [[신라]]는 [[대동강]] 이남(사실상 [[백제]] 영토), [[당나라]]는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기로 약속한다.
주요 군사적인 지휘권은 [[당나라]]가 가졌으며, [[신라]]의 지휘권은 [[당나라]]의 지휘권에 예속되었다.
===대 [[백제]] 공격===
[[그림:나당 연합군 백제 공격.jpg|나당 연합군의 [[백제]] 공격|frame]]
[[신라]]는 [[당나라]]에게 지속적인 [[백제]] 공격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660년]] 여름에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서 13만 대군을 동원하게 된다. [[당나라]]의 군대는 수군으로 움직였다. [[신라]]는 [[김유신]]의 인솔 아래 5만의 병력과 [[당나라]]군에게 지급할 군량미를 가지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는 나라가 어수선한 상태에서 수륙으로 대군을 맞이하자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하였다. [[당나라]] 군대의 상륙을 막으려던 [[백제]]는 [[백강]] 하구에서 패배하였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도 [[황산벌]]에서 [[계백]]을 물리치고 [[사비성]]에 육박하였다. [[백제]]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난하여 저항을 하려고 하였으나, 상황이 글렀음을 알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신라]]군이 [[황산벌]]에서 [[계백]]의 끈질긴 저항으로 예정된 날짜보다 늦게 [[사비성]]에 도착하였다. [[당나라]] 군 총사령관인 [[소정방]]은 이에 [[신라]]장군들을 문책하려 하였으나, [[김유신]]의 강력한 반발로 문책을 하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연합군의 내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나라]]는 약속과 달리 옛 [[백제]] 땅에 5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를 [[당나라]]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나당 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켰지만, 곧이어 일어난 [[백제 부흥운동]]에 직면하게 되었다. 나당 연합군은 [[백제]] 부흥군에 맞서서 옛 [[백제]] 영토 전역에서 3년 간의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또한 [[일본]]의 지원군도 맞서 싸워야 했다. 결국 [[663년]]이 되어서야 나당 연합군은 [[백제]] 영토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다.
===대 [[고구려]] 공격===
[[그림:나당 연합군 고구려 공격.jpg|나당 연합군의 [[고구려]] 공격|frame]]
나당 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킨 이듬해인 [[661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소정방]]을 총사령관으로 한 [[당나라]] 군 35만은 [[평양성]]으로 향했다. [[신라]] 김유신도 [[당나라]]군의 군량미를 이끌고 [[고구려]]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소정방]]의 군대는 [[고구려]]에 대패하였고(사수 전투), [[김유신]]이 간신히 [[평양성]] 인근에 도착한 [[661년]] 12월에는 이미 후퇴를 결심하였다. 비록 이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못했지만, 이제 [[당나라]]는 [[신라]]의 지원 아래 손쉽게 [[평양성]]까지 진격할 수 있으며, [[고구려]]는 양쪽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동시에 막아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667년]] [[연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하자,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 총공격을 감행한다. [[667년]] 말에 [[설인귀]]를 총사령관으로 한 나당 연합군의 총 공격은 북에서는 [[당나라]]의 54만 대군이 [[고구려]]를 향해 쳐들어왔으며, 남에서는 [[신라]]의 27만 대군([[신라]]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음)이 [[고구려]]를 동시에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보장왕]]은 [[668년]] 봄에 항복을 선언하고 만다.
===연합군의 붕괴===
[[당나라]]는 [[고구려]] 영토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고, 사실상 [[당나라]]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신라]]를 노골적으로 협박하면서 [[신라]] [[문무왕]]에게 '계림 도독'으로 삼고, 경주를 '계림 도독부'로 지칭하는 등 사실상 [[신라]]마저 삼킬 야욕을 보인다.
[[신라]]는 이에 저항으로 맞선다. [[670년]] [[신라]] [[김유신]]은 [[소정방]]을 죽이고, [[신라]]군은 옛 [[백제]]지역을 차지하기 위해서 공격을 감행한다. 나당 연합군은 이렇게 붕괴하였다.
곧이어 [[신라]]와 [[당나라]]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671년]] [[사비성]]이 [[신라]]군에 떨어지고, [[신라]]는 옛 [[백제]]지역을 점령한다. 또한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당나라]] 군대를 괴롭혔다. [[당나라]]는 [[임진강]] 유역에서 [[신라]]를 여러 차례 공격하였으나, [[675년]] [[매소성]] 전투에서 20만 대군이 대패하고, 이듬해 [[676년]] 기벌포에서 수군이 궤멸함으로써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당 연합군은 결과적으로 [[신라]]의 [[백제]] 통합을 위한 전쟁이 되어 버렸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는 끝내 손에 넣지 못하고, [[발해]]에게 넘겨주었다. 반면 [[신라]]는 [[백제]]영토를 합병했을 뿐만 아니라, 흔들리는 나라를 잘 추스리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최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는 사대적 정치세력이 최초로 등장하는 모습이 바로 나당 연합군의 탄생이었다.
[[분류:신라]]
[[분류:당나라]]
[[분류:전쟁]]
===결성배경===
[[신라]]는 [[642년]] 이후 [[백제]] 의자왕의 지속적인 공격에 나라가 흔들리고 있었다. 대 [[백제]] 주요 거점인 [[대야성]]은 점령당했고, 심지어 [[한강]] 유역의 최후 보루인 [[당항성]](당성)도 [[고구려]]-[[백제]]의 협공에 놓이는 상황이었다. 내부적으로는 귀족들의 반란인 [[비담·염종의 난]]이 일어나 나라가 어수선하였다. 이런 국난을 자체적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웠으며, 가장 심각한 [[백제]]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부의 힘을 빌려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 접근하여 [[백제]] 공격을 논의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당나라]]에 손을 벌린다.
[[당나라]] 또한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끊임없이 소모되고 있었다. [[당나라]]는 대 [[고구려]] 전쟁([[고당 전쟁]])을 마치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할 세력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당나라]]의 사정을 꿰뚫은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켜주는 대가로 [[고구려]] 공격을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군사동맹을 맺게 된다. [[신라]]는 [[당나라]]의 군사력으로 최대 관건인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으며, [[당나라]]는 [[신라]]의 지원으로 [[고구려]]를 손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영토 분배는 [[신라]]는 [[대동강]] 이남(사실상 [[백제]] 영토), [[당나라]]는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기로 약속한다.
주요 군사적인 지휘권은 [[당나라]]가 가졌으며, [[신라]]의 지휘권은 [[당나라]]의 지휘권에 예속되었다.
===대 [[백제]] 공격===
[[그림:나당 연합군 백제 공격.jpg|나당 연합군의 [[백제]] 공격|frame]]
[[신라]]는 [[당나라]]에게 지속적인 [[백제]] 공격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660년]] 여름에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서 13만 대군을 동원하게 된다. [[당나라]]의 군대는 수군으로 움직였다. [[신라]]는 [[김유신]]의 인솔 아래 5만의 병력과 [[당나라]]군에게 지급할 군량미를 가지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는 나라가 어수선한 상태에서 수륙으로 대군을 맞이하자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하였다. [[당나라]] 군대의 상륙을 막으려던 [[백제]]는 [[백강]] 하구에서 패배하였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도 [[황산벌]]에서 [[계백]]을 물리치고 [[사비성]]에 육박하였다. [[백제]]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난하여 저항을 하려고 하였으나, 상황이 글렀음을 알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신라]]군이 [[황산벌]]에서 [[계백]]의 끈질긴 저항으로 예정된 날짜보다 늦게 [[사비성]]에 도착하였다. [[당나라]] 군 총사령관인 [[소정방]]은 이에 [[신라]]장군들을 문책하려 하였으나, [[김유신]]의 강력한 반발로 문책을 하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연합군의 내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나라]]는 약속과 달리 옛 [[백제]] 땅에 5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를 [[당나라]]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나당 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켰지만, 곧이어 일어난 [[백제 부흥운동]]에 직면하게 되었다. 나당 연합군은 [[백제]] 부흥군에 맞서서 옛 [[백제]] 영토 전역에서 3년 간의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또한 [[일본]]의 지원군도 맞서 싸워야 했다. 결국 [[663년]]이 되어서야 나당 연합군은 [[백제]] 영토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다.
===대 [[고구려]] 공격===
[[그림:나당 연합군 고구려 공격.jpg|나당 연합군의 [[고구려]] 공격|frame]]
나당 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킨 이듬해인 [[661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소정방]]을 총사령관으로 한 [[당나라]] 군 35만은 [[평양성]]으로 향했다. [[신라]] 김유신도 [[당나라]]군의 군량미를 이끌고 [[고구려]]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소정방]]의 군대는 [[고구려]]에 대패하였고(사수 전투), [[김유신]]이 간신히 [[평양성]] 인근에 도착한 [[661년]] 12월에는 이미 후퇴를 결심하였다. 비록 이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못했지만, 이제 [[당나라]]는 [[신라]]의 지원 아래 손쉽게 [[평양성]]까지 진격할 수 있으며, [[고구려]]는 양쪽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동시에 막아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667년]] [[연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하자,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 총공격을 감행한다. [[667년]] 말에 [[설인귀]]를 총사령관으로 한 나당 연합군의 총 공격은 북에서는 [[당나라]]의 54만 대군이 [[고구려]]를 향해 쳐들어왔으며, 남에서는 [[신라]]의 27만 대군([[신라]]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음)이 [[고구려]]를 동시에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보장왕]]은 [[668년]] 봄에 항복을 선언하고 만다.
===연합군의 붕괴===
[[당나라]]는 [[고구려]] 영토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고, 사실상 [[당나라]]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신라]]를 노골적으로 협박하면서 [[신라]] [[문무왕]]에게 '계림 도독'으로 삼고, 경주를 '계림 도독부'로 지칭하는 등 사실상 [[신라]]마저 삼킬 야욕을 보인다.
[[신라]]는 이에 저항으로 맞선다. [[670년]] [[신라]] [[김유신]]은 [[소정방]]을 죽이고, [[신라]]군은 옛 [[백제]]지역을 차지하기 위해서 공격을 감행한다. 나당 연합군은 이렇게 붕괴하였다.
곧이어 [[신라]]와 [[당나라]]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671년]] [[사비성]]이 [[신라]]군에 떨어지고, [[신라]]는 옛 [[백제]]지역을 점령한다. 또한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당나라]] 군대를 괴롭혔다. [[당나라]]는 [[임진강]] 유역에서 [[신라]]를 여러 차례 공격하였으나, [[675년]] [[매소성]] 전투에서 20만 대군이 대패하고, 이듬해 [[676년]] 기벌포에서 수군이 궤멸함으로써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당 연합군은 결과적으로 [[신라]]의 [[백제]] 통합을 위한 전쟁이 되어 버렸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는 끝내 손에 넣지 못하고, [[발해]]에게 넘겨주었다. 반면 [[신라]]는 [[백제]]영토를 합병했을 뿐만 아니라, 흔들리는 나라를 잘 추스리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최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는 사대적 정치세력이 최초로 등장하는 모습이 바로 나당 연합군의 탄생이었다.
[[분류:신라]]
[[분류:당나라]]
[[분류: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