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 출생. 후에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자랐다. [[현대건설]] 회장을 지낸 기업인 출신 정치인으로 [[서울특별시]] 시장을 역임했다. [[2007년]] 8월 20일 한나라당의 17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됐으며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다. 대한민국 17대 대통령(재임 [[2008년]] 2월 25일~[[2013년]] 2월 24일)을 지냈다. 물욕이 많아 돈과 관련된 의혹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현대건설 사장 및 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중동 특수에 힘입어 많은 공사를 수주했으나, 저가 수주나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훗날 현대건설이 부도위기에 놓이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있다.
*#서울특별시장 당시 [[청계천 복원]]으로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서울 시내에 볼거리와 문화적 공간을 마련했다는 데에서는 찬사를 받았으나, 청계천 복원이 생태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었고(도올 선생 "큰 어항에 불과") 복원 과정에서 스토리가 담긴 상가가 사라졌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교통체계 개편으로 환승시스템이 정착되는 등 발전을 이루었다. 교통체계 개편 당시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가 모델로 삼은 도시는 [[브라질]]의 [[꾸리찌바]]라고 한다.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BBK]]의혹과 [[다스]], [[도곡동 땅]] 문제가 불거졌으나 '경제대통령'을 구호로 지리멸렬한 민주·진보진영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됐다. 당선 직후 [[BBK 특검]] 수사를 받았으나 사실상 특검이 무혐의로 그를 풀어 주었다. 대통령 취임 이후 불통과 인사 참사로 어려움을 겪다 [[광우병 촛불집회]]로 벼랑 끝까지 몰렸다 겨우 회생했다. 또한 [[2008년]]부터 불어닥친 서브프라임 모기지발 [[2008년 금융위기 | 세계 금융위기]]로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치솟는 등 경제가 흔들렸다. 그 과정에서도 무리한 환율개입과 리먼브러더스 인수 시도 등으로 비판을 자초했으나 한편으로는 통화스와프 등을 체결해 금융위기를 비교적 완만하게 극복했다. 부동산 폭락 우려가 있자 저금리와 금융규제 완화로 부동산시장을 활성화시켰지만([[10.21 부동산 대책]]) 이는 훗날 [[가계부채]] 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재벌중심주의, 수출 중심, 각종 개발규제를 폐지하는 부동산개발 중심 경제정책으로 일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