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 회의

역사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 Constitutional Convention. 미국 헌법을 만들기 위한 아메리카 대표자 회의. 이들 참석자들을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라고 부른다.

제헌 회의의 개회

알렉산더 해밀턴제임스 매디슨이 중심이 되어 개최한 1786년의 주간 통상 회의에서 하나의 제안이 채택되었다. 다음 해 필라델피아에서 모든 주의 대표들이 모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이 실현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당시 주간 통상 회의에서는 고작 5개 주 만이 대표를 파견했기 때문이다.

1787년셰이스 반란은 중앙정부에 무관심하던 지도자들을 일깨웠다. 특히 `조지 워싱턴`이 제헌 회의에 참가하자 많은 이들이 필라델피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1787년 5월, 로드아일랜드를 제외한 모든 주의 대표자 55명이 모여 필라델피아 주 의사당에서 제헌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건국의 아버지들`이라 불리웠으며, 이들의 평균 나이는 44세로 비교적 젊은 편이었다.

제헌 회의의 전개

제헌 회의는 조지 워싱턴은 의장으로 선출했다. 거의 모든 대표자들이 미국이 보다 강력한 중앙정부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더 이상 의견 일치는 없었다.

제헌 회의는 크게 2개의 안으로 갈려졌다. 버지니아안(Virginia Plan)과 뉴저지안(New Jersey Plan)이 그것이다. 두 안건의 차이점은 아래와 같다.

  • 버지니아안: 강력한 중앙정부. 양원제. 하원에서 상원 선출(따라서 작은 주는 연방 상원의원을 못 가지는 일도 생김)
  • 뉴저지안: 연합 정부의 체계와 비슷한 느슨한 중앙정부. 양원제. 각 주에서 상원의원 선출(모든 주가 연방 상원의원을 가지게 됨)

그리하여 연방 상원의원은 뉴저지안으로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 있었다. 노예제 문제였다. 각 주마다 대표의 숫자를 결정할 때, 노예의 숫자를 어떻게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인구로 포함시켜야 하나? 재산으로 포함해야 하는가?

노예를 많이 보유한 주와 노예를 적게 보유하거나 노예제가 폐지될 주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7월 2일, `벤저민 프랭클린`을 의장으로 하고 각 주당 1명의 대표로 구성하는 `대위원회(Grand Committee)`를 구성하고 이 위원회가 `대타협(Great Compromise)`의 기초가 될 제안을 마련하였다. 이 제안에 따르면 의회는 양원으로 구성하고, 각 주는 하원에서 인구 수에 근거한 의석을 배당받는다. 그리고 연방 상원에서는 각 주당 2명의 의원을 배정한다. 그리고 노예는 우습게도 한 사람 당 자유인의 3/5으로 계산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1787년 7월 16일, 제헌 회의는 투표를 통해 이 타협안을 통과시켰다. 또한 노예를 지닌 남부 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중앙 정부가 20년 동안 노예 무역을 금지하지 못한다는 것에도 동의했다.

1787년 헌법

1787년 9월 17일, 제임스 매디슨이 많은 부분 손을 댄 헌법 초안이 완성되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주(States)의 권리와 중앙 정부의 권리 조율: 모든 권한은 아래에서 나온다. 미국 헌법과 미국 중앙정부가 최고의 법과 권력이지만, 각 주에 중요한 권한들을 양보한다.
  • 삼권분립: 연방 의회도 상하 양원이 합의해야만 법안을 통과할 수 있으며, 행정부는 이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한다. 또한 대법관은 종신으로 복무하기 때문에 행정부와 의회에서 보호된다.

헌법의 비준과 개정의 문제

1788년 초에 위의 헌법을 가지고 각 주는 비준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바로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의 논쟁이다.

  • 연방주의자: 미국 헌법에 찬성, 중앙 정부에 찬성. 벤저민 프랭클린조지 워싱턴의 지지. 겉으로는 `연방주의자`라는 단어 때문에 각 주의 권리를 더욱 보장한다는 느낌도 가진다.
  • 반연방주의자: 미국 헌법에 반대. 미국 헌법은 세금을 인상하고, 각 주의 권력을 휘두르며, 개인의 자유를 말살할 것이라고 생각함. 패트릭 핸리(Patrick Henry)와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개인의 권리를 헌법에 일일이 열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연방주의자들의 뜻대로 상황은 흘러갔다. 1788년 6월에 뉴햄프셔가 헌법을 비준하여 헌법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요건(13개 주의 2/3 비준)을 충족했다. 그러나 가장 큰 주인 버지니아와 뉴욕주가 의견이 양분되어 좀처럼 합의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 `개인의 기본권 조항을 헌법에 명시한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비준했다. 노스캐롤라이나는 비준을 미룬 채 다른 주들의 헌법 개정을 관망했으며, 로드아일랜드는 비준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렇듯 제헌 회의에서 만들어진 미국 헌법 초안은 수많은 논쟁을 뒤로 하고 미국 중앙 정부를 탄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