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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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조선일보 사장인 방응모의 손자이다. 1954년 조선일보의 대표가 되었다. 1964년 조선일보 회장이 되었고, 30년 이상 조선일보를 최대신문으로 키웠다. 이 과정에서 독재정권과 결탁한 것이 곳곳에서 드러나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조선일보의 구독자 확장은 각종 경품과 무가지 사업으로 이뤄졌으며, 이는 신문시장질서를 위배하는 행위이다. 말년에는 문화재단과 장학회를 설립하여 자신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2003년 사망하였다.

밤의 대통령 방일영

권력화한 언론의 모습으로 흔히 인용되는 '밤의 대통령'은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2003년 8월8일 작고)을 일컫는 말이다. 1992년 11월 당시 방 회장 고희연에서 사원대표인 신동호 스포츠조선 대표가 낮의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분이 계셨지만 밤의 대통령은 오로지 회장님 한분이셨다라고 말했다고 조선일보 사보에 실린 것을 <기자협회보>가 다시 보도하여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이는 신동호 대표의 조어가 아니다. 이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은 낮의 대통령 박정희였다. 방 회장은 당시 박 대통령의 가까운 술친구였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 대통령이 요정에 가보면 방 회장은 화술로나 주량으로나 늘 좌중을 휘어잡았다. 방 회장은 술이 거나해지면 동석자들의 지갑까지 털어 기생들에게 듬뿍 돈을 쥐어주었다고 한다.

한번은 박 대통령이 방 회장의 흑석동 집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기생들을 불러 술판을 벌였는데 박 대통령이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며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불렀고 나중에는 '미꾸라지 잡기'라는 일본 민속무까지 멋들어지게 추었다는 일화도 있다. 나이는 박 대통령이 다섯 살 위였지만 술집출입 경력으로 보나 여자들 다루는 솜씨로 보나 방 회장은 촌놈 박 대통령보다 한참 위였다.

박 대통령은 자신을 대통령 형님이라 부르는 방 회장을 제일 팔자가 좋은 사람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낮에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밤에는 임자가 대통령이구먼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좋게 말해 당대 풍류객이고 한량이라는 얘기다. 조선일보가 펴낸 방 회장 전기에 권번출신 기생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사람이 바로 방 회장이란 이야기까지 버젓이 나오는 것을 보면 박 대통령이 그렇게 부른 것도 무리가 아니다.

박 대통령은 재임시 1년에 한 두번 의례적으로 신문사 발행인을 한자리에 불러 환담을 나누었다. 자주 독대한 신문사주는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과 동아일보 김상만 사장 정도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의 은밀한 거래가 이뤄진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짐작할 만하다.

조선일보사는 1967년 박 정권이 베푼 특혜에 힘입어 건물과 코리아나호텔을 짓기 위해 일본에서 4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아주 좋은 조건으로 들여왔다. 코리아나호텔이 세워질 당시 조선일보 구 사옥 일부가 도시계획에 포함돼 있었으나 유일하게 철거되지 않았다. 차관 도입시 조선일보 경제부에 근무했던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코리아나호텔 건립을 위한 자금은 1967년 대일청구권 자금 중 상업차관으로 들여온 것이며 언론사가 도입한 상업차관으로는 첫 번째인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국내금리가 연 26%나 됐던 것과 비교하면 연 7∼8%에 불과한 상업차관을 허용한 것 자체가 엄청난 특혜임에 틀림없다. 당시 상업차관을 주선한 사람은 방일영씨와 막역한 사이이며 민주 공화당의 돈줄로 통하는 김성곤씨로 알고 있다.

위 글은 (김해식 <한국언론의 사회학> 나남 1994년. 119∼120쪽)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