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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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을 장려하고, 진흥하기 위해서 유학을 중심으로 과목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사교육의 발달과 재정의 어려움으로 발전이 뎌뎠다. 입학조건은 대개 귀족자제들이었다.

크게 유학부와 잡학부로 나눠져 있는데, 국자학(國子學)· 태학(大學)· 사문학(四文學) 등은 유학부, 서학(西學)·산학(算學)·율학(律學) 등이 잡학부이며, 이를 합하여 경사 6학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대체로 유학만을 중시하였다.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성균관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공민왕 때 다시 국자감으로 환원하였다. 그러다 1362년에 다시 성균관으로 고쳐 조선시대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