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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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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6대 임금. 생몰연대 [[756년]]~[[780년]]. 재위 [[765년]]~[[780년]]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탄생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 35대 임금인 [[경덕왕]]에게는 딸이 있었고,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경덕왕]]은 후계자가 없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경덕왕]]은 [[표훈]]이라고 하는 승려랑 벗하며 지냈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는 고승이며, 하느님과 이야기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라]] [[경덕왕]]은 표훈에게 "나를 계승할 아들을 낳고 싶은데,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하였더니, 표훈이 한울님(하느님)에게 왕이 아들을 갖게 하도록 노력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울님은 "[[경덕왕]]에게 아들을 낳게 해주면 나라를 멸망하게 되는 꼴이 되므로, 차라리 딸을 낳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지만, [[경덕왕]]이 나라를 멸망시켜도 좋으니 사내 아이만을 바란다고 간청하여 결국 하느님이 소원을 이루어 주었다. 얼마 후 [[경덕왕]]의 부인 만월부인이 혜공왕을 낳았고, 이것을 기뻐한 [[경덕왕]]이 혜공왕에게 "건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760년]]([[경덕왕]] 19년) 왕태자로 책봉되었다가, [[765년]] [[경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시 나이가 8세였으므로 태후(만월부인)가 섭정했다. [[768년]] [[일길찬]] [[대공]](大恭)과 [[아찬]] [[대렴]](大廉)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96각간의 난) [[김은거]](金隱居)를 비롯한 왕군(王軍)이 진압했다. [[770년]]에는 [[대아찬]] [[김융]](金融)이 반역을 꾀하자 주살(誅殺)했다. [[774년]] [[이찬]] [[김양상]](金良相)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이듬해에는 [[이찬]] [[김순]](金順)을 시중으로 삼았다. [[775년]] [[김은거]] 및 [[이찬]] [[염상]](廉相)과 [[정문]](正門)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777년]] [[이찬]] [[김주원]](金周元)을 시중으로 삼았다. [[780년]]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포위하자, [[김양상]]이 [[이찬]] [[경신]](敬信)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진압했다. 혜공왕은 이 난중에 살해되었으며 [[경신]]의 추대를 받은 [[내물왕]]계의 [[김양상]]이 왕위에 올라 [[태종 무열왕]] 직계의 왕통이 단절되었다.
[[분류:신라]]
[[분류:임금]]
[[신라]] 36대 임금. 생몰연대 [[756년]]~[[780년]]. 재위 [[765년]]~[[780년]]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탄생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 35대 임금인 [[경덕왕]]에게는 딸이 있었고,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경덕왕]]은 후계자가 없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경덕왕]]은 [[표훈]]이라고 하는 승려랑 벗하며 지냈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는 고승이며, 하느님과 이야기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라]] [[경덕왕]]은 표훈에게 "나를 계승할 아들을 낳고 싶은데,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하였더니, 표훈이 한울님(하느님)에게 왕이 아들을 갖게 하도록 노력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울님은 "[[경덕왕]]에게 아들을 낳게 해주면 나라를 멸망하게 되는 꼴이 되므로, 차라리 딸을 낳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지만, [[경덕왕]]이 나라를 멸망시켜도 좋으니 사내 아이만을 바란다고 간청하여 결국 하느님이 소원을 이루어 주었다. 얼마 후 [[경덕왕]]의 부인 만월부인이 혜공왕을 낳았고, 이것을 기뻐한 [[경덕왕]]이 혜공왕에게 "건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760년]]([[경덕왕]] 19년) 왕태자로 책봉되었다가, [[765년]] [[경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시 나이가 8세였으므로 태후(만월부인)가 섭정했다. [[768년]] [[일길찬]] [[대공]](大恭)과 [[아찬]] [[대렴]](大廉)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96각간의 난) [[김은거]](金隱居)를 비롯한 왕군(王軍)이 진압했다. [[770년]]에는 [[대아찬]] [[김융]](金融)이 반역을 꾀하자 주살(誅殺)했다. [[774년]] [[이찬]] [[김양상]](金良相)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이듬해에는 [[이찬]] [[김순]](金順)을 시중으로 삼았다. [[775년]] [[김은거]] 및 [[이찬]] [[염상]](廉相)과 [[정문]](正門)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777년]] [[이찬]] [[김주원]](金周元)을 시중으로 삼았다. [[780년]]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포위하자, [[김양상]]이 [[이찬]] [[경신]](敬信)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진압했다. 혜공왕은 이 난중에 살해되었으며 [[경신]]의 추대를 받은 [[내물왕]]계의 [[김양상]]이 왕위에 올라 [[태종 무열왕]] 직계의 왕통이 단절되었다.
[[분류:신라]]
[[분류:임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