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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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리
  • 독도는 한민족 고유 영토로 현재 일본이 영유권 분쟁을 점화하려 노력하고 있다.

목차

고대

고대 독도는 우산국(울릉도)의 부속영토였다. 울릉도에서 날이 맑은 날씨에는 독도가 보인다. 우산국 사람들도 독도를 매번 보면서 살았으며, 이를 토대로 독도를 사실상 점유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우산국 사람들은 신라에도 자유롭게 왕래하였다. 따라서 뱃길로 신라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독도는 더욱 손쉽게 오고갔다. 우산국은 서기 512년 신라에 병합되었다. 우산국신라의 영토로 병합되면서 독도도 신라에 동시에 편입되었다.

여지지」에 따르면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는 모두 옛날 우산국의 땅이며, 우산도(독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 고, 중세에는 일본인들은 독도를 송도라고 불렀으며, 우리민족은 우산도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조선왕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주민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공도정책'이라고 하여 섬을 비우는 정책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멀리 떨어진 섬주민을 육지로 옮겼다. 울릉도 주민들도 경상도강원도로 수용되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인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마음놓고 돌아다녔다. 이것이 바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시초가 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안용복은 멀리 바다에 항해를 나갔다가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일본 정부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들고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안용복은 스스로 '울릉·우산 양도 감세장'이라고 자칭하였다. 당시의 많은 문헌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항상 같이 이름이 따라다닌 것으로 보아 울릉도와 독도는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당시 조상들은 알고 있었다. 이후 일본1697년 1월 관리를 보내어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일본 정부의 결정을 통보하였다.

일본측 사료

  • 은주시청합기: 독도의 내용이 최초로 기록된 일본 문헌이다. 일본의 관리가 영주의 명을 받고 1667년 은기도라는 섬을 순시하면서 작성한 보고서에 독도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 기록에서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에 속한 섬으로 보고하였다.
  • 1876년 일본 내부성 자료: 일본은 근대화 정책의 일환으로 전 국토에 대한 정밀한 지도와 지적도를 작성하기 위하여 모든 현에 지도와 지적도를 조사·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때 시마네현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현의 지도에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문의를 하였다. 일본 내무성은 5개월 반에 걸친 조사 끝에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영토이며, 이것을 관리들에게 알리라는 지시사항을 내려 보냈다.
  • 1883년 일본 해군 수로국 수로지: 일본 해군 수로국에서는 최초의 수로지(항해용 바다 지도)를 제작한 이래 지금까지 제작하고 있다. 가장 처음에 발간한 환영수로지에서는 독도를 '리앙크루 바위섬'이라고 표기하고, 울릉도에 딸린 섬으로 명시하였다. 이후 1945년 6월에 발간한 수로지까지 독도를 울릉도에 속한 섬으로 기록하고 있다.
  • 「수산시험장보고」: 부산광역시 사상구의회 황구화 의원은 지난 1967년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구입한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수산시험장보고」를 공개하였다. 이 책자에서는 1905년부터 1937년까지 32년간 조선의 바다를 측량, 어장과 바다 깊이 등을 수록해 발간한 것으로 독도를 죽도로 표기하고 울릉도와 함께 조선의 육지 대륙붕에서 떨어진 조선의 도서로 소개하고 있다. [2]

근대이후

독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던 일본은 갑자기 1905년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통해서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선언하였다. 일본의 주자은 '주인 없는 섬'을 가진 것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5년 전인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통해 고종 황제는 독도를 울릉군수의 관할구역으로 선포했다. 이미 대한제국이 주인임을 선포한 섬을 빼앗아 간 침략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독도를 빼앗아간 이유는 당시 일본러일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독도는 군사적으로 러시아 함대의 동태를 살피기 좋은 위치에 있었으며, 또한 주변의 황금어장은 일본 어민들에게 큰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

해방 이후 연합군은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명시하고, 일본의 영토에서 제외한다는 선언을 발표하였다(1946년 1월 29일). 또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도 독도는 우리의 영토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일본은 계속해서 독도를 넘나들었다.

이렇게 되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울릉도 주민들이었다. 독도에 갈 수 없고, 독도 주변의 고기와 해산물을 채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울릉도 주민들은 홍순칠을 중심으로 독도 의용 수비대를 결성하여 1953년부터 1956년 12월 30일까지 독도를 자체적으로 방위하였다(→독도 의용 수비대). 이후 독도의 경비 업무는 울릉도 경찰서 예하 독도 수비대가 맡고 있다.

각주

  1. 만기요람」에서 인용
  2. 동아일보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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