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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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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 무제.
*[[중국]] [[한나라]]의 7대 황제. [[기원전 156년]]생. 재위 [[기원전 140년]]~[[기원전 87년]]. 이름은 유철(劉徹).
===왕권강화===
한 무제는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다. 아시다시피 [[유학]]이란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사상이다. 한 마디로 뼛속까지 황제를 중심으로 한 질서에 나라를 맞추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학]]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을 관리로 뽑아서 더욱 그 뒤를 든든히 하였다.
한편 왕권의 가장 위협이 되는 지방제후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추은령]]'을 반포하였다. 이것은 제후왕이 죽으면 그의 아들들에게 영지를 쪼개주도록 한 것이다. 영지를 한명에게 통째로 물려주지 못하게 한것이다. 제후왕들의 영지는 아들들에게 세분되어서 쪼개졌으며, 따라서 큰 제후국도 사라지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제후들에게 죄를 덮어씌워 마구잡이로 제후국을 없애버렸다. 사라진 제후국에는 황제가 파견한 관리가 그곳을 다스리게 된다.
말기에는 전국을 13주로 재편하고, 주마다 '[[자사]]'를 두어 주의 행정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제 황제권은 중국 전역에 미치게 되었다.
===대외정책===
한 무제는 대외원정에 매우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강력해진 황제권으로 인해서 중앙재정과 중앙군이 강화됨에 따라 대외원정을 강행하였다.
당시 한나라에 가장 큰 위협은 [[흉노]]였다. 한 무제는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서 [[장건]]이라는 신하를 파견하였다. [[흉노]]에 반감이 있는 월지라는 나라와 동맹을 맺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장건]]은 [[흉노]]에게 붙잡혔고, 월지국은 너무나 서쪽으로 멀리 후퇴한 뒤였다. [[장건]]이 탈출해서 무제 앞에 갔을 때는 그는 애초 목적인 동맹은 못 맺은 상태였다. 보통 같으면 사형이겠지만 [[장건]]은 무제에게 보고를 하면서 [[서역]]에서 보고 들었던 것들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바로 무제는 호기심이 끌렸고, 특히나 [[흉노]]와 싸울 명마를 얻기 위해서 무제는 [[서역]]으로 원정을 단행한다.
장군 [[곽거병]], [[위청]], 이광 등을 시켜 [[흉노]]를 북방으로 몰아낸 다음, 하서지역을 정벌하여 [[서역]]으로 향하는 통로를 확보하였다. [[기원전 104년]]에는 [[이광리]]를 시켜 [[파미르 공원]] 북서지역에 있는 대완국([[페르가나]])를 정벌하였다. 이로서 [[서역]]과의 통로를 완전히 확보하고 흔히 말하는 '[[비단길]]'이 열리게 되었다. 상인들이 이것을 놓칠리가 없었다. 바로 [[서역]]과의 대대적인 교역이 시작되었고, [[한나라]]의 주요 수출품인 비단이나 그릇등이 [[서역]]을 통해서 [[로마]]에까지 이르렀다.
한 무제는 [[서역]]으로 향하는 새 영토를 안정화시키기 위하여 한인을 이주시키고, 또 [[둔전]](屯田)을 두었다.
[[서역]]원정과 함께 남방에서는 지금의 [[복건성]](푸젠성)에 있던 민월(閩越) ·동월(東越) 두 왕국을 합치고, [[기원전 111년]]에는 [[남월]]왕국을 멸망시켜 9군을 두고, [[사천성]](쓰촨성) 변경에서 [[운남성]](雲南윈난)·귀주(구이저우貴州) 방면에 이르는 염방(冉駹)·수(巂)·작(筰)·야랑(夜郞)·전(滇) 등의 종족을 귀순시켜, 그곳에 6군을 두었다.
동으로는 [[동호]]족과 [[고조선]]을 공격하여 [[왕검성]]을 함락시키고, 그 지역에 4개 군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대외원정 뒤에는 엄청난 경비가 필요하였다. 또한 황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사치를 일삼으로서 무리한 경제정책을 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경제정책===
그리하여 증세와 새로운 세금을 매겼으며, 소금과 철과 같은 생활필수품은 국가에서 [[전매]](독점 공급)하고 균수(均輸)·평준법(平準法)을 제정하고, 심지어는 백성들에게 작위를 팔기도 했으나, 관리의 부정이 심해지고, 국민의 생활도 궁핍해져 [[한나라]] 붕괴의 도화선이 되었다. 제후에게는 황실에 정기적으로 세금을 납부하라는 주금율도 제정한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농민봉기와 황태자의 반란([[무고의 난]])이 일어났으며 말년에는 백성을 보살피는 데 힘썼으나, 이미 기울기 시작한 경제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농민들은 한 무제 이후 점점 몰락해 갔다. 높은 세금과 각종 군역에 혹사당했으며, 결국 할 수 없이 [[호족]]에게 땅을 바치고 몸을 의지하였다. 그럼 이 [[호족]]이란 집단은 누구냐? 이 [[호족]]은 원래 농민이었다. 그러나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우경의 시작으로 많은 부를 획득하였고, 그 부를 바탕으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계속적으로 소득을 높여나갔다. 농민들이 땅을 바치고 [[호족]] 밑으로 들어가자 국가는 세금을 거둘 사람들이 사라진 것이고, [[호족]]들은 더욱 많은 농장을 경영하게 되었다. 이것이 한나라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평가===
강력한 황제권으로 중앙집권국가를 완성하고, 대외원정을 통하여 동서교통로를 여는 등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경제적 위기를 자초하고, 농민층을 몰락시키고, 중앙권력의 비대화로 관료부패와 외척, 환관세력들이 일어나는 등 중국왕조가 몰락하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틀'을 제시하여, 나쁜 의미에서도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분류:한나라]]
[[분류:임금]]
*[[중국]] [[한나라]]의 7대 황제. [[기원전 156년]]생. 재위 [[기원전 140년]]~[[기원전 87년]]. 이름은 유철(劉徹).
===왕권강화===
한 무제는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다. 아시다시피 [[유학]]이란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사상이다. 한 마디로 뼛속까지 황제를 중심으로 한 질서에 나라를 맞추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학]]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을 관리로 뽑아서 더욱 그 뒤를 든든히 하였다.
한편 왕권의 가장 위협이 되는 지방제후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추은령]]'을 반포하였다. 이것은 제후왕이 죽으면 그의 아들들에게 영지를 쪼개주도록 한 것이다. 영지를 한명에게 통째로 물려주지 못하게 한것이다. 제후왕들의 영지는 아들들에게 세분되어서 쪼개졌으며, 따라서 큰 제후국도 사라지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제후들에게 죄를 덮어씌워 마구잡이로 제후국을 없애버렸다. 사라진 제후국에는 황제가 파견한 관리가 그곳을 다스리게 된다.
말기에는 전국을 13주로 재편하고, 주마다 '[[자사]]'를 두어 주의 행정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제 황제권은 중국 전역에 미치게 되었다.
===대외정책===
한 무제는 대외원정에 매우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강력해진 황제권으로 인해서 중앙재정과 중앙군이 강화됨에 따라 대외원정을 강행하였다.
당시 한나라에 가장 큰 위협은 [[흉노]]였다. 한 무제는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서 [[장건]]이라는 신하를 파견하였다. [[흉노]]에 반감이 있는 월지라는 나라와 동맹을 맺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장건]]은 [[흉노]]에게 붙잡혔고, 월지국은 너무나 서쪽으로 멀리 후퇴한 뒤였다. [[장건]]이 탈출해서 무제 앞에 갔을 때는 그는 애초 목적인 동맹은 못 맺은 상태였다. 보통 같으면 사형이겠지만 [[장건]]은 무제에게 보고를 하면서 [[서역]]에서 보고 들었던 것들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바로 무제는 호기심이 끌렸고, 특히나 [[흉노]]와 싸울 명마를 얻기 위해서 무제는 [[서역]]으로 원정을 단행한다.
장군 [[곽거병]], [[위청]], 이광 등을 시켜 [[흉노]]를 북방으로 몰아낸 다음, 하서지역을 정벌하여 [[서역]]으로 향하는 통로를 확보하였다. [[기원전 104년]]에는 [[이광리]]를 시켜 [[파미르 공원]] 북서지역에 있는 대완국([[페르가나]])를 정벌하였다. 이로서 [[서역]]과의 통로를 완전히 확보하고 흔히 말하는 '[[비단길]]'이 열리게 되었다. 상인들이 이것을 놓칠리가 없었다. 바로 [[서역]]과의 대대적인 교역이 시작되었고, [[한나라]]의 주요 수출품인 비단이나 그릇등이 [[서역]]을 통해서 [[로마]]에까지 이르렀다.
한 무제는 [[서역]]으로 향하는 새 영토를 안정화시키기 위하여 한인을 이주시키고, 또 [[둔전]](屯田)을 두었다.
[[서역]]원정과 함께 남방에서는 지금의 [[복건성]](푸젠성)에 있던 민월(閩越) ·동월(東越) 두 왕국을 합치고, [[기원전 111년]]에는 [[남월]]왕국을 멸망시켜 9군을 두고, [[사천성]](쓰촨성) 변경에서 [[운남성]](雲南윈난)·귀주(구이저우貴州) 방면에 이르는 염방(冉駹)·수(巂)·작(筰)·야랑(夜郞)·전(滇) 등의 종족을 귀순시켜, 그곳에 6군을 두었다.
동으로는 [[동호]]족과 [[고조선]]을 공격하여 [[왕검성]]을 함락시키고, 그 지역에 4개 군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대외원정 뒤에는 엄청난 경비가 필요하였다. 또한 황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사치를 일삼으로서 무리한 경제정책을 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경제정책===
그리하여 증세와 새로운 세금을 매겼으며, 소금과 철과 같은 생활필수품은 국가에서 [[전매]](독점 공급)하고 균수(均輸)·평준법(平準法)을 제정하고, 심지어는 백성들에게 작위를 팔기도 했으나, 관리의 부정이 심해지고, 국민의 생활도 궁핍해져 [[한나라]] 붕괴의 도화선이 되었다. 제후에게는 황실에 정기적으로 세금을 납부하라는 주금율도 제정한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농민봉기와 황태자의 반란([[무고의 난]])이 일어났으며 말년에는 백성을 보살피는 데 힘썼으나, 이미 기울기 시작한 경제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농민들은 한 무제 이후 점점 몰락해 갔다. 높은 세금과 각종 군역에 혹사당했으며, 결국 할 수 없이 [[호족]]에게 땅을 바치고 몸을 의지하였다. 그럼 이 [[호족]]이란 집단은 누구냐? 이 [[호족]]은 원래 농민이었다. 그러나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우경의 시작으로 많은 부를 획득하였고, 그 부를 바탕으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계속적으로 소득을 높여나갔다. 농민들이 땅을 바치고 [[호족]] 밑으로 들어가자 국가는 세금을 거둘 사람들이 사라진 것이고, [[호족]]들은 더욱 많은 농장을 경영하게 되었다. 이것이 한나라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평가===
강력한 황제권으로 중앙집권국가를 완성하고, 대외원정을 통하여 동서교통로를 여는 등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경제적 위기를 자초하고, 농민층을 몰락시키고, 중앙권력의 비대화로 관료부패와 외척, 환관세력들이 일어나는 등 중국왕조가 몰락하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틀'을 제시하여, 나쁜 의미에서도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분류:한나라]]
[[분류:임금]]